아직 그리지 못 한 풍경

딸아이와 단둘이 떠난 여행 【울릉도 여행기 1】 본문

여행..그 뒤안길

딸아이와 단둘이 떠난 여행 【울릉도 여행기 1】

緣佑(연우) 2012. 9. 4. 11:46

 

 

 

딸아이의 개학일을 일주일 정도 남겨두고 아이와 뜻깊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문득 독도여행을 하기로 딸아이와 결의하고 독도여행 일정을 잡아

새벽2시 집을 나서 영등포에서 묵호가는 여행사의 셔틀버스에 올라 탔다.

집을 나설때만 해도 조용하던 하늘은 영등포에 도착하니

벼락같은 빗방울이 딸아이와 나를 반긴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새벽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동해 묵호항에 도착하니

여명이 밝아오고 하늘이 문을 열어 구름사이로 햇살이 얼굴을 내밀어 준다.

 

▲ 영등포 신세계 백화점 3시 집합 10분후 출발

      하염없는 빗줄기가 심술을 부리듯 쏟아 진다.

      그런 빗줄기를 헤집고 하나, 둘 여행객들이 모여 들었다.

     

 

▲묵호항에 도착하기전 하늘 동쪽은 여명이 밝아 온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내내 빗줄기가 쏟아져 내려 걱정을 하였는데 대관령을 넘으니

빗줄기는 잣아들고 보라빛 새벽이 여행자의 즐거운 마음을 더해 준다.

 

 

 

▲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정원 연못에 연꽃이 어쁜 자태로 아침을 맞이한다.

     분홍빛 수줍음이 어찌나 매력있던지 한참을 연꽃 앞을 서성였다.

     연꽃향이 그윽한 아침 묵호항으로 발길을 옮긴다.

 

 

▲ 묵호에서 썬플라워2호에 승선하며

 

      썬플라워2호는 썬플라워1호에 이어 2012년 5월5일 취항한 대형카페리선이다.

      정원805명이 승선할 수 있으며 차량100여대를 선적할수 있다.

      묵호에서 울릉도(161KM)까지는 약3시간 30분이 소요되며 평균속도는 35노트라고 한다.

     휴대용 네이비게에션으로 속도를 측정할 결과 평균 속도는 50KM를 조금 넘어 항해하였다.

     썬플라워2호가 취항되면서 울릉도도 자가용을 이용하여 여행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휴가철에는 좀처럼 도선표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리고 울릉도는 육지에 비교하여 유류대가 매우 비싸다 이번 여행때도

   유류대는 리터당 평균 2299원 정도 였으며 LPG 충전소는 없기때문에

    LPG차량을 이용해 울릉도 여행을 계획한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 썬플라워2호가 망망대해를 헤치고 울릉도를 향해 항해중이다.

      한 세시간 정도  항해를 하다보면 멀리 울릉도가 구름사이로 신비롭게 나타난다.

 

 

 

딸아이는 망망대해 넘어 신비롭게 나타난 울릉도에 눈을 띠지 못했다.

 

 

 

▲ 구름사이에 내려 앉은듯 섬 울릉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섬 둘레를 신비롭게 둘러싼 구름이 그곳이 섬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울릉도 도동항에 상륙했다.

    푸른하늘이 이곳으로 오던 내내 뿌리던 빗줄기를 무색하게 했다.

    이제부터 울릉도의 여행의 시작이다.

    딸 아이는 처음 시작되는 여행길이 설레이는 듯 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일정을 나서기전 도동항 주변을 산책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것은 없는 듯 하다

    다소 새로운 신축건물이 몇채 더 들어섰을 뿐이다.

    

 

 

우리 일행을 태우고 왔던 썬플라워2호가 울릉도를 빠져 나가는 여행객을 태우고  푸른 물결을 헤치고 묵호항으로 향다.

 

 

 

 

도동항의 풍경

 

 

 

 

 

                  울릉도의 연혁

 

  •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 (300년~1년)에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함
  •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현포, 남서, 저동리)

  • 삼국지위지동이전 옥저조의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에 관한 기사에서 언급된 동해안의 섬이 울릉도라는 견해가 있음.
  • 512년 지증왕 13년 신라장군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울릉도가 최초로 문헌에 등장)930년 고려태조 13년 조공한
  •     우릉도(芋陵島)주민에게 작위를 하사함.

  • 1018년 현종 9년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농업을 폐하게 되어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구를 하사함. 1032년 덕종 원년 우릉성주가 아들을 보내어 조공함.
  • 1157년 의종 11년 우릉도 주민을 이주시킬 계획으로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함
  • 1379년 우왕 15년 왜구가 무릉도(武陵島) 주민들을 본토로 귀환케 함.1417년 태종 17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귀환시킴.
  • 1614년 광해군 6년 대마도주에게 울릉도(鬱陵島)에 왜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냄.
  • 1693년 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사이 외교분쟁 발생. (안용복 1차 도일)
  • 1694년 숙종 20년 삼척첨사 장한상 울릉도 수토
  • 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2차 도일 일본 백기주(伯耆州) 태수와 담판,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일본인의 출어.벌채금지서계 조선에 전달)
  • 1882년 고종 19년 이규원 검찰사 울릉도 검찰, 울릉도 개척령 반포, 전석규 도장에 임명. (수토정책 철훼)
  • 1883년 울릉도 주민이주 시작(16호 54명)
  • 1895년 고종 32년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에서 전임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
  • 1900년 광무 4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눔(도감->군수)
  • 1903년 대한제국 광무 7년(고종) 군청소재지 이전(태하->도동)
  • 1906년 광무 10년 울도군을 경상남도에 편입. (1914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
  • 1915년 군(郡)제를 폐지하고 제주도와 더불어 도(島)제로 변경, 울도군청(鬱島郡廳)을 울릉도청(鬱陵島廳)으로,
  •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편.(행정, 치안 총괄)

  • 1949년 정부수립 후 울릉군으로 환원. (경상북도 울릉군)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 현재의 1읍2면 체제 구축.
  •                                                                                                                                      [ 자료 : 울릉군청 ]

     

     

     

     

    ▲ 내수전 일출 전망대로 오르다 보면 좌측에 시원한 망망대해와 함께 섬의 끝자락 섬목과 관음도의 풍경이 보인다.

         얼마전 섬목과 관음도를 연육교로 연결하여 도보관광이 가능하

     

     

    내수전 일출 전망대 입구

     

     

    ▲ 내수전 일출전망대에서 바라 본 저동항 풍경

     

    해발 440m의 내수전 일출전망대는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수전고개에서 마가목,동백나무, 소나무등이 빽빽한 숲의 터널을 지나  촘촘한 목재 계단을 약 10여분 오르면 내수전 전망대에 다다른다.

    전망대에오르면 좌측에 관음도, 섬목과 우측에 저동항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은 정면에 독도를 관측할 수 있다.

     

     

     

    내수전 일출 전망대에서 바라몬 죽도의 모습

     

       죽도는 울릉도 저동항에서 북동쪽으로 4㎞, 도동항에서 7㎞ 떨어진 해상에 있는 섬으로 면적은 208㎢이며, 높이는 106m이다.

       울릉도 부속 섬 중 가장 큰 섬이다.

       이섬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대섬·대나무섬·댓섬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 모조리 벌목하여 농토로 바뀌었고 20여 호가 거주하며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현재에는 44살의 총각이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전화가 개설되기 전에는 울릉도와의 연락은 봉수를 이용하였다. 상부봉수(上部烽燧)는 식수의 절수(絶水)를, 중부봉수(中部烽燧)는 울릉도의 용무발생을,

       하부봉수(下部烽燧)는 급한 환자 발생을 알렸으며 이 봉수가 올라오면 배가 죽도로 출동하였다고 울릉문화지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로 부르는 바람에 이 대섬을 독도로 차각하는 애매함도 있는 듯 하다.

       대나무가 많아 죽도라 불리어 졌다는 이섬에는 현재 평평한 농지를 개간하여

      섬 안쪽에는 대나무가 없고 절벽쪽에만 왕 대나무가 서식하다고 한다.

       울릉문화지를 찾아 보니 이곳에는 재미난 설화가 전해기고 있었다.

     

    옛날 옛적에 어부 세 사람이 고기를 잡기 위해 돛단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날따라 고기가 잡히지 않아 걱정을 하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돛단배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운 바람과 파도가 돛단배를 뒤흔들었다.

    어부 세 사람은 죽을힘을 다하여 돛단배를 부둥켜안고 목숨이라도 살아남기를 하늘에 빌었다.

    집을 떠난 지 닷새째 되는 날에야 바람도 자고 파도도 잔잔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집을 찾을지도 몰랐다.

    그때 저 멀리 구름처럼 생긴 섬이 보였는데, 사람이 살 것 같지는 않았다.

    어부들은 양식이 다 떨어져 배도 고프고 먹을 물도 없으니

    일단 섬에 올라가서 먹을 물이라도 구하자고 하였다.

    구름에 싸인 섬은 제법 컸는데, 그 섬에는 대나무만이 우거져 있었다.
    어부 세 사람은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안개가 짙은 곳을 가 보니 울창한 왕대밭이 있었다.

    왕대밭이 있으면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라고 생각한 세 사람은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때, 저 멀리 기와집 같은 것이 보였다. 세 사람이 그 집을 향해 가 보니

    수염이 하얀 노인 한 분이 대문을 열어 놓고 세 사람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염이 하얀 노인의 목소리는 점잖으면서도 우렁찼다.

    그리고 눈매에서는 빛이 나고 용모는 단정하여 범치 못할 위엄이 느껴지는 것이 속세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부 세 사람은 고기를 잡기 위해 울릉도에서 출항한 것부터 파도를 만나 지금까지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을 이야기하고 나서

    나흘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해 배가 너무 고프다며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노인이 처음에는 이 섬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하다가 잠시 후에 모양은 사과같이 생겼으나 맛은 사과가 아닌 것을 주었다.

    어부 세 사람은 너무 배가 고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사과같이 생긴 과일을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어 버렸다.

    한 개로는 양이 차지 않아 한 개씩만 더 달라고 노인에게 부탁을 했더니

    이 과일은 한 개만 먹어도 1년을 살 수 있는 신비한 과일이라고 하였다.

    노인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하니 배가 고픈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부 세 사람이 생기를 되찾자 노인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하였다.

    이들은 너무나 기뻐 노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배를 몰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저 멀리 수평선 위에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노인은 사과같이 생긴 과일을 세 개 주면서

    햇빛이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하며 석 달 열흘 만에 먹어야 된다고

    당부하고는 배 안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어부 세 사람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가족이 살고 있는 울릉도로 돌아왔다.

    며칠째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아 죽은 줄만 알았던 어부 세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서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조차 신기해하였다.

    어부 세 사람은 하얀 수염의 노인이 살고 있는 안개에 싸인 신비한 섬과

    사과같이 생긴 신기한 과일, 왕대나무의 숲 등을 이야기하며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어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 중에 호기심 많은 몇 명은 어부

    세 사람을 부추겨 식량과 물을 싣고 노인이 살고 있는 신비한 섬을 찾기 위해 바다를 헤매었다.

    그러나 제철이 아닌 복숭아꽃이 바다에 떠서 내려오는 것은 보았지만 풍랑이 심해

    노인이 살고 있는 그 안개에 싸인 신비한 섬은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자료 : 울릉문화원]

     

     

     

     

    ▲ 저동항과  촛대바위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지고 저녁을 먹고 딸아이와 저동항 야경에 취해 산책에 나섰다.

    저동항 하역장에 새 형상의 조형물이 있었는데 난 갈매기 형상이라 하니 딸아이는 갈매기가 아니고 팽귄이라 한다.

     

     

     

     

    드넓은 수평선 바다위 고기잡이 어선이 신비의 불빛을 밝힌 밤

        바다는 고요한 풍경속으로 바람을 내어 준다.

        

        촛대바위는 저동항 슬픈 전설을 간직한 바위이다. 

        이바위의 진모는 저동항의 냉동창고에서 바라보면  그 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독도 다음으로 일출을 볼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서 촛대 바위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면 그 풍경에 모두 넋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답다 한다.

        촛대바위는 바다에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촛대를 세워 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장군이 투구를 쓴 모습과 비슷하여 ‘장군바위’라고도 한다.

        독도 서도에서도 촛대바위라느니 자연지명이 있는데, 저동리의 촛대바위는 배 타고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린 효성스런 딸의 이야기가 전하여 ‘효녀바위’라고도 불린다.


     

     ◈ 촛대바위의 전설

     

    지금의 저동마을에 어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일찍이 죽고 딸과 함께 살았습니다. 조그마한 배 한 척과 손바닥만한 밭이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겨울 양식이라고는 옥수수뿐이었는데 옥수수가 흉작이 되었으니 하는 수 없이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작은 배로 바람 부는 날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온다고 쉬고, 바람이 분다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

    눈이 뿌리고 바람이 이는데도 배를 타고 고기잡이에 나가야만 하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수심이 떠올랐습니다.

    배가 나갈 때는 파도가 심하지 않더니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 때쯤에는 파도가 세고 눈발도 거세어졌습니다.

    아버지를 바다에 보낸 딸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굶더라도 오늘은 쉬셔야 했는데……. 옥수수 농사나 잘 되었던들…….’

    한숨을 쉬면서 기다렸으나 밤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딸은 먹는 것도 잊고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 와서는 ‘산사람이나 살아야지’라고 하며 달랬으나 막무가내였습니다.

    며칠을 굶은 딸의 효성이 지극해서인지, 며칠 뒤에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니 바닷가에 나가보자 싶어서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파도와 파도 사이에 돛을 단 배가 떠오고 있었습니다.
    ‘배가 들어온다!’
    딸은 기뻐서 외쳤습니다. ‘저 만큼에 보이니까 얼마 뒤에는 뭍에 닿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오는 것 같기는 하나 뭍에는 닿을 줄을 몰랐습니다.

    자꾸 보고 부르노라니 배에서 ‘곧 간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은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중을 나가야지’ 싶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파도를 헤치고 갔습니다.
    때는 겨울이요 눈발이 시름시름 뿌리는데도 파도를 헤치며 배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효성도 바다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치고 지쳐서 우뚝 서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 라고 부르는 바위가 곧 이 노인의 딸인 효녀의 화석이라고 합니다.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실은 헛것이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 자료출처 : 울릉문화지 이무용 ]

     

     

     

    저동항의 밤풍경

     

    울릉도 여행중 저동항의 밤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쭉뻗은 수평선 넘어 밤을 밝히는 고깃배와 바다위 그려지는 불빛의 풍경 그리고  방파제 넘어 불어오는 바닷바람

    이 길을 걷노라면 고즈넉한 어촌의 풍경에 빠지게 된다.

     

     

     

    ◈일출이 아름다운 저동항

     

    독도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 바로 울릉도이다.

    울릉도 북동쪽의 섬목이나 현포항도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손꼽히지만,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한 저동항의 일출에는 비길 바가 아니다.

    촛대처럼 생긴 바위 위로 해가 떠오를 때면 마치 촛대봉 위에 온 세상을 밝히는 촛불을 켠 듯 장관의 풍경을 연출한다.
    저동항의 우측으로는 울릉도 해안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릉군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과 저동항을 연결하는 628m의 해안에 해안 산책로를 개설하였다.

    이곳은 도동 여객선터미널 좌안 산책로로 이어지는 해안 코스로, 행남등대에서 저동항과 푸른 바다, 죽도를 구경할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산책로 입구부터 봄에는 산나물로, 여름에는 녹음 우거진 숲으로, 가을에는 보랏빛 해국과 노란 털머위꽃으로, 겨울에는 눈내리는 겨울바다로 관람객을 사로잡는 곳이기도 하다.

     

     


    ◈ 박정희 전대통령과 저동항의 인연

     

    역대 대통령 중 울릉도를 방문한 대통령은 한명도 없다고 한다. 

    다만 전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및 대통령권한대행으로 1962년 울릉도를 방문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데통령은  군함을 타고 울릉도를 방문하였는데, 군함은 울릉도로 들어갈 수 없어

    저동항 먼바다에서 정박하고, 박대통령은 보트로 갈아타고 저동항으로 올라서야만 했다.
    당시의 저동항은 말이 항구이지 방파제나 제대로 된 접안 시설 하나

    갖추어지지 못한 초라한 어촌에 불과하였다. 국가원수격인 박정희는 결국 보트에서 내리려다 물에 빠진다.

    당시 상황에 대해 수협사무실에 모인 울릉도 주민들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때는 축깡(축항, 방파제)이 덜 돼갖고, 배가 올 수 없는기라.

    그래, 군함에서 뽀뜨로 이동해 가, 뽀뜨에서 내리다가 옷을 베리뿐기라.”

    박정희 전대통령이 물에 빠지자, 수행했던 사람들도 당황했지만 가장 당황했던 사람은 박정희 본인이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서울로 돌아와 곧장  울릉도 주민들과 약속한‘울릉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게 되고,

    온전한 방파제 하나 없던 저동에는 불과 2년 만에 방파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저동항이 동해안 어업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울릉도 주변 해역의 풍부한 수산 자원 때문이기도 하지만,

    울릉도에서 제일 먼저 방파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울릉도의 방파제 규모도 현재까지 저동항이 가장 크다.

     

    ◈ 바위산 하나가 통째로 들어간 저동항 건설

     

    방파제 시설이 들어서기까지 저동항은 자연 포구로서 지역 주민들이 해마다

    촛대바위 부근에 석축을 쌓아 포구로 이용했다. 하지만 태풍이 한 번 불면 여지없이 휩쓸려 나가곤 했다.

    “옛날에는 망태기에 줄 매가지고 미고 했는데, 20년 했는데, 저기 보이는 촛대바위라고 있지요.

    저기 3분지 1도 못 했어. 지금 높이가 10m 되는데 그전에는 큰 파도 한 번 치면 무너지고,

    또 쌓아 놓으면 넘어지고 해마다 해도 끝없이 넘어지곤 했는데.”(울릉읍 김성우)

    방파제 사업은 1967년에 저동항이 동해안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된 뒤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방파제 축조를 위해 내수전에 있던 석산 하나가 다 들어갔다고 한다.

    현재 방파제의 높이는 지속적인 보강으로 10m에 이르지만, 당시만 해도 6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저동항의 울릉도 오징어 축제

     

    밤바다를 밝히는 오징어잡이배의 집어등 불빛이 상징하듯 울릉도는 오징어와 더불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동항을 중심으로 울릉도 전역에서 열리는 울릉도 오징어축제는 울릉도의 비경을 배경으로 푸른 동해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아보고,

    오징어 건조과정을 체험하면서 각종 오징어 요리를 즐길 수 있는 행사이다.

    2001년 8월에 처음 개최되었는데, 관광객과 주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광 축제로, 울릉도 오징어축제추진위원회에서

    오징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매년 7월 말경 펼쳐져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오징어와 관련한 것은 다 체험할 수 있다는 울릉도 오징어 축제의 주요 행사로는 오징어무료음식시식, 열린바다낚시대회, 오징어 활복시연,

    오징어요리경연, 오징어조업체험승선, 오징어조업현장견학, 오징어맨손잡기, 전통뗏목경주, 호박엿늘리기, 오징어마라톤대회 등을 들 수 있다.

     

    ◈ 저동항 중심의 어업현황

     

    현재 울릉군에서 행해지는 어업 활동의 중심은 오징어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징어잡이는 보통 7월 말경부터 시작해서 10월까지가 성수기이다.

    이 때문에 오징어잡이 비수기에는 전복과 소라와 같은 패류와 각종 어류, 해삼, 문어 및 해조류 등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어구 또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어류를 유인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집어등, 낚싯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꿰어 놓은 주낙바구니, 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수경, 미역을 걷어 올리는 미역낫 등이 점점 현대식으로 교체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 1965년부터 1970년대까지 울릉군의 수산인구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한일어업협정의 체결을 계기로

    어업 근대화와 어촌개발시책이 시행되면서 점차 이곳의 어선 세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어선 세력의 증가는 어업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연안어업이 축소되고 원양어업과 양식어업이 증가하게 된 것은

    울릉군 어업별 생산구조 변화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료 : 울릉문화지]

     

     

     

     

    ▲ 저동항에서 바라본 행남 등대

     

     

     

     

    ▲ 행남등대

     

     

     

     

    행남등대

     

    밤바다의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고요한 여름밤의 적막감을 깨운다.

    여행객들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 여름밤의 꿈을 낚는다.

    딸아이는 바위 틈에 숨은 게를 찾아 이곳 저곳을 들추고 소곤소곤 여행자의 여름밤 추억이 익어가는 시간이다.

     

     

    수평선 넘어 고깃배

     

     

     

     

    해안 산책로에서 저동항으로 들어 가는 입구

        이곳을 지나면 숨은 저동항의 풍경이 신비스럽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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