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리지 못 한 풍경
문수산성에서 본문
아침 기상 알람을 5시 30분에 맞추어놓고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잠이들었다.
장인어른의 기일이라 처가에서 12시가 조금 넘어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 아침일찍 등산갈 준비를 해놓고 씻고 나니 시간은 2시가 넘어 그렇게 흘러 버렸다.
아침을 알리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비비고 일어나 딸 아이를 깨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데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친구집에 들려 친구아들을 픽업해 고려산을 향해 자유로를 거쳐 일산대교를 넘어섰다.
김포 풍무지구를 지나며 왠지 고려산에는 진달래가 아직은 피지 않아 오히려 문수산성이 더 좋을 듯 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안개속을 헤집고 문수산성 북문앞에 도착해 잠이 들어버린 아이들을 깨웠다.
아이들은 차에서 배낭을 내리며 춥다며 조금 더 있다가 산에 오르면 안돼냐며 엄살을 떨었다.
"안돼 조금있으면 더워 질꺼야 "
그렇게 아이들의 엄살을 일축해버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성을 따라 오르는 길엔 진달래가 제법 화사하게 듬성듬성 피어 올랐다.
순간 혼잣말로 " 고려산으로 갈걸 그랬나? " 했더니만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여기는 고려산 아니야 ? "하며 받아 친다.
"여기는 문수산성인데 "
"여기 전에도 왔는었는데 ... 고려산 진달래 봐야지"
딸아이가 성화를 부리며 말을 던져 놓는다.
"아니야 아빠 생각에 아직 고려산 진달래는 피지 않았을것 같아 다음주에 가자"
우리는 그렇게 산성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문수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성(石城)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82년 숙종(8년)강화유수 조사석이 문수산성 축조를 건의하여
여양부원군 민유중(인현왕후의 父)과 어영대장 김익훈이 현지조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신들의 무관심속에 보류되었던 축성문제를 1685년 판부사 민정중이 조정에 병자호란 등과 같은 난을 토대로 문수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적극 건의함으써 숙종 14년(1688년) 9월 축성을 하였다.
정확한 축성연대는 성의 성석(城石)에 각자되어있는 기록에서 그 연대를 알수있다.
축성당시 성문은 취예루, 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비밀통로)가 있었다.
이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하는 해안에 위치하고 있어 강화에서 육지를 연계하는 관문 역활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 해안쪽은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산능선을 따라 성벽만이 남아있다.
병자호란 후 강화권역의 해안 경계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 문수산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됨에 따라
축성되어진 문수산성은 축조 공사를 시작한지 10개월 만에 완성하게 된다.
문수산 정상 장대지에 오르면 그 지리적 중요성을 알수 있는데 이곳에 서면 북서쪽으론 강화해협과 강화권역이 한눈에 보이며
북쪽으로는 개풍군, 개성땅이 지척이다.
문수산정은 1866년 병인양요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1866년 1월 초 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9명과 조선 천주교도 수천명을 처형하게 된다.
이때 탈출한 3명의 프랑스 신부 중 리델이 청나라 텐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즈에서
이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한다.
이는 1946과 1847년 두차례 걸쳐 조선 침략에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을 만들어 주게된다.
이를 이유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 통상조약을 노린 주중공사 '벨로네'는 제독 로즈에게 조선 침략을 명하고 이해 9월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과 군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강화를 점령하고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죽였으니 조선인을 죽이겟다고 협박하며 신속히 통상조약을
맺으라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때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 문수산성이다.
조선 조정은 군사 50여명을 문수산성에 배치해 프랑스군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갑곶진에 상륙한 로즈가 70여명의 정찰군을 파견하여
문수산성을 정찰하던중 문수산성 남문지점에서 치열한 총격적이 벌어져 프랑스군이 5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남문쪽으로 돌진하여 우수한 화력을 앞세워 문수산성을 점령하게 된다.
군사적 열세인 조선군은 동쪽 능선을 따라 지금은 통진으로 후퇴한다.
문수산성을 점령한 프랑스 군은 남문을 비롯한 부속 건물을 비롯 민가 30여채를 불태우고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한편 조선 조정은 이경하, 이용희, 양헌수 각각 대장,중군, 천총에 임명하여 '순무영'을 설치하고 프랑스의 우수한 화력을 이겨내교
강화도를 수복하는데 기습작전이 필요하다 판단됨에 따라 10월1일 밤 양헌수는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 (지금의 전등사 일대)으로 잠입하여 잠복하였다가 10월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전공를 세운다.
이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전사6명 포함하여 사상64명에 이르게 된다.
이 정족산성 전투의 패배한 프랑스군은 사기가 저하되고, 피로가 누적되어 10월5일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과 무기, 금은괴를 약탈해 간다.
이 사건은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게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산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안개는 빗물이 되어 날리었다.
산 능선을 따라 구렁이가 담을 넘듯 천천히 안개도 산을 넘는다.
영은이는 산을 급하게 오른 탓인지 조금 쉬었다 가자며 하는 말이
" 이제 나이가 들어서 예전만 산을 못오르겠어 ! "
순간 웃음도 나오고 어처구니도 없다.
물 한모금에 목을 축여 쵸코릿으로 출출함을 달래고 다시 산을 오른다.
정상부근에 오르니 안개가 바다를 이루고 장엄한 풍경을 만들어 준다.
조금만 일찍 올라왔으면 더욱 멋진 풍경을 만날수 잇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더해지기도 했다.
[ 강화대교와 강화해협]
[강화대교와 강화읍내 전경]
[ 서해바다 넘어 북한땅 ]
장지대에 오르니 북한땅이 헐벗은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산은 나무를 모두 베어내 헐벗고 붉은빛 황토가 들어났다.
뿌연 안개가 천천히 걷히면서 희미한 안개속으로 들어나는 북한의 풍경에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낮고 작은 회색빛 건물 , 그리고 남한의 산새와 또다른 산(山)의 모습이 확연히 남쪽과는 구분되어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더 상세하게 촬영이 될듯한데 안개와 박무가 많은 날인지라 시원한 사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산 정상에 올라 김밥과 과일로 배도 채우고, 산 아래 펼쳐지는 장엄한 운해도 본 아이들은 기분이 좋은가보다
산을 내려갈 땐 콧노래를 부르며 앞을 질러 내려간다.
내려갈때 너희들 끼리 알아서 길을 찾아 내려가라 했더니만 갈림길에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고 산을 올라오며 보았던 풍경을 더듬어
산을 내려온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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