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리지 못 한 풍경
거제읍성과 포로수용소 본문
거제 여행을 떠나는 날 ..
어제밤 챙겨놓은 배낭을 챙겨들고 일산에서 5시30분 집을 나섰다.
반포에서 이지점장님을 픽업해서 수지를 경유해 친구와 합류하고 천안 휴게소에서 김교수님과 만나기로 하였기때문에 다소 이른시간에 집을 나서야 했다.
천안 휴게소에서 김교수님과 만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거제로 향했다.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선터라 고속도로는 비교적 한산했다.
거제에 11시쯤 도착해서 첫번째 답사지인 포로수용소로 향하던 중 김 교수님이 고현읍성을 먼저 방문하자는 제안에 고현읍성을 답사하고 포로 수용소를 답사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당초 고현읍성은 답사지엔 없었던 터라 정보도 없었다. 다행이 김 교수님이 함께하시어 고현읍성의 설명과 더불어 답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거제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 2번째로 큰섬으로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상군이라 칭하고 거노,삼수,매진이 등의 3속현을 두었다.
거노현은 지금의 대우조선이 위치한곳이고, 삼수현의 중심은 지금의 다대와 다포로 추정되고 있으며, 매진이 현은 거제면 명진리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후 757년에 거제도를 거제현으로 통합하고 아주, 송변,명진의 3속현을 두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성현 또는 거제현으로 불리워 지고 거제현의 중심을 둔덕면 거림리에 두었다.
도 지정기념물 162호로 지정된 기성현터에는 신라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목조건축물 터가 남아 있는데 신라시대에도 이곳이 지역의 중심지역이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거제현은 가조현(지금의 거창)과 함께 진주목으로 이전하였고, 조선 세종4년에 거제현이 복군되며서 신현읍 수월리로 옮겼다가
식수가 부족하고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사등성(거제시 사등면 사등리)으로 옮겨진다.
이후 세종 14년 지금의 거제 시청이 위치한 고정부곡에 거제읍성(고현성)을 축성하게 된다.
이후 성종20년 (1489년) 거제부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거제읍성(고현성)이 무너지고 현종5년(1664년)거제현을 현제의 거제면으로 이전하고
거제읍성을 고현성이라 칭하게 된다.
이후 조선후기 지금의 거제면을 중심으로 도심이 형성되면서 거제부의 유적인 기성관,거제질청,거제향교가 거제면에 위치하고 있다.
약400여년 동안 거제의 중심지로 발달되었던 지금의 고현(신현)은 지속적인 개발의 붐을 타고 고현성의 일부만을 간직한채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으로 생포된 포로들을 부산에서 수용하다 그 시설이 협소하고 포로의 숫자가 늘어나자 유엔군은
1950년 11월 27일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이곳 거제에 1,200여 헥타르에 이르는 어마 어마한 규모의 수용소를 설치하고
그 이듬해인 1951년 2월부터 전쟁포로 수용업무를 시작하여 인민군 포로 15만명, 중공군 포로 2만명등 최대 17만3천여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는데
그중에는 여자포로도 3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 포로수용소에서는 휴전협정으로 포로교환이 이루어질 시기까지 강제징집을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사이에 유혈사태가
자주 벌어지고 당시 포로수용소 소장 (도드준장)까지 납치하는 냉전시대 이념 갈등의 축소판이였다고 한다.
싸워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싸웠던 병사들, 그들에겐 이념같은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앗는지도 모른다.
얼마전 고지전이란 영화를 보고 '당시의 전쟁상황에 딱들어 맞는 영화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픈 역사,,,,
슬픈 역사....
우리는 지금도 그 슬픈 역사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분단
대다수의 국민들은 당시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을게다.
이젠 한 세대가 황혼길에 접어 들거나 한줌의 흙이 되어버린 긴 세월이 흘러 버렸다.
어떤이는 원치않은 이산가족이 되어 그 기나긴 세월을 가족 얼굴한번 못보고 그리움에 애만 태우다 생을 마감했을 것이고
또 어떤이는 아직도 그 그리움을 타는 가슴속에 감추어 두고 눈물을 훔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련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그렇게 부르짖던 통일은 언제쯤이나 되려는지 이젠 김정일이도 김일성을 따라 운명을 달리했건만
조국통일의 그날은 아직도 기약이 없다.
고현 포로수용소자리를 돌아보고 계룡산에 올랐다.
계룡산 정상에는 당시 포로수용소를 관측하던 통신 시설이 그날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듯 잔해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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