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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그 뒤안길

청풍의 하루

緣佑(연우) 2007. 10. 16. 01:23

 

설악산 종주 등반에  회사 워크샵에 몸은 많이 지쳐 있었다.

10월 두째주 오늘은 아이들이 쉬는  놀토이다 ..

이번 달에는 여러 행사들로 인하여  이번주가 아니면 가족 여행의 시간이 없었다.

 

 

피곤한 잠자리를 박차고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은 여행 준비에 분주했다.

남제천 IC를 빠져나와 차로 조금 달리자니 금월봉이 보였다.

금월봉의 아름다움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우리는 숙소를 향했다.

구기자 나무에서는 구기자 열매가 탐스럽게 가을의 정취를 전하고 있었다.

첫날은 피곤함에 아이들은 호텔 수영장에서 놀게 한후  난 호텔 방에서 잠을 취했다.

저녁 6시 30분 쯤 제천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친구녀석이 가족들과 호텔에 도착했다.

오랜만의 만남에 추억을 이야기 하며 밤을 맞이하고 가볍게 맥주한잔을 기울였다.

 

 

둘째날 호텔 근처 청풍문화재 단지를 돌았다 .

충주땜의 건설로 수몰될 문화재를 이전한 이주단지에는 구옥과 비석, 고인돌 각종의 문화재를 전시했다.

 

 

아이들이 전망대에 올라 충추호의 정취에 취해 콧 노래를 흥얼거렸다.

 

 

문화재 단지내 산성을 오르는 중턱에 자리한 연리지 소나무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함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한다. 두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기도 한다.

알기 쉽게 사랑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무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라고 한다.

연리목을 가끔 볼수 있으나 가지가 맞 닿는 연리지는 매무 희귀하다고 한다.

 

중국의 전설상의 새와 나무인 비익조와 연리목에서 비익이라는 새는 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이기에

항상 나란히 한몸이 되어서 난다하며, 연리라는 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이지만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나무결이 상통한다는 데서 남녀간의 깊은 정분을 뜻하기도 한다.

 

당 나라 시인 백거이는 당나라 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그린 장한가에서

"하늘에서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 연리지가 되도다" 라고 읊었다 한다

 

우리내의 어설픈  사랑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안을 애틋한 사랑이기를 ......

 

 

아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산성을 올랐다

 

 

산성에서 내려다 본 청 풍 문화재 단지

 

 

충주호의 푸른호수에 하늘이 그대로 담겨졌다 .

 

 

 

피곤에 지친 영은이는 주막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주막에서  도토리 묵과 파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다시 길을 재촉해야 했다.

 

 

산 등성이에 피어난 산국(들국화)의 향이 가을속 가득 퍼져가고 

 

초가집 담벼락 감나무에 감이 탐스럽게 달려 가을의 정취를 더해가고 있었다.

 

 

영은이의 미소도 가을 햇살속으로 퍼져가고

 

 

지우의 손끝에서도 따스한 가을이 느껴지는 날

푸르름은 가을이 문을 열어

멀어져가는 여름날을 그리워 한다.

 

 

 

삼한 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의림지에 푸른 하늘이 내려와 앉았다.

의림지는 원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저수지로 본래의 이름은 임지(林池)였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바꿀 때 제천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川)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로 저수지의 이름에 ‘의(義)’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때의 음악가인 우륵이 만들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으며,

또 다른 이야기로는 현감인 박의림이 만들었다고도 한다.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충청도관찰사인 정인지가 고쳐짓고,

다시 세조 3년(1457) 체찰사가 된 정인지가 크게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뒤 1910년부터 5년간에 걸쳐 3만여명이 참가하여 보수하였고, 1972년 대홍수로 서쪽 둑이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하였다.
저수지의 둘레는 약 1.8㎞, 면적은 158,677㎡, 수심은 8∼13m이며, 주위에는 순조 7년(180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세워진 경호루가 있다.
제천의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원삼국시대의 수리시설로서,

당시의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의림지 인공 폭포

 

 

 

 

푸른창공으로 두팔가득 하늘을 담고 싶은 사루비아 꽃잎이 바람에 춤을 추나

무심결 지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이들은 자연의 경치보다 놀이기구에 관심이 더 많은 듯하다.

의림지 파크에서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워 한다.

 

 

서울로 돌아 오는 길 우리는 박달재를 넘었다.

옛날 한양으로 과거보기 위한 선비와 상인들의 많은 사연을 가지고 넘었던 박달재...

조선시대 중엽 과거철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길을 재촉하던 영남(嶺南)도령 박달은 제천땅을 지나던중

잠시 머문 한 농가에서 청순한 소녀 금봉낭자에게 반하고 만다.
이심전심 사랑을 고백한 두 남녀는 달밝은 밤에 밀회(密會)를 나누며 다시 만날날을 기약한다.

 선비 박달은 금봉이가 정성스레 싸준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달고 과거길을 떠났으며 금봉낭자는 박달도령이

과거에 급제하여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성황당에 치성(致誠)을 올리지만

백일기도(百日祈禱)가 끝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넋나간 듯 날마다 박달도령을 부르며 산길을 헤메다가 �내

 상사(相思)의 한을 안고 이승을 하직한다.
한편 박달도령은 과거(科擧)에 낙방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금봉에게 돌아갈 용기가 없어

 한양에 머물러 있다가 금봉의 장례 사흘후 되돌아와 금봉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땅을 지며 목놓아 울다가 언듯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상을 보고 뒤 쫓아가서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금봉의 모습은 사라지고 박달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등령을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몇해전 박달재 이곳에 오면 어느 노인이 열심이 이 통나무 조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세월이 흘렸던가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뉘역 뉘역 저무는 해를 등을 지고 박달재를 내려오는 길 ...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두움이 깔리고

우리는 박달도령과 금봉의 사랑을 뒤로하고 박달재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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