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리지 못 한 풍경
최남단 해남, 진도를 찾아서 본문
녹우당의 해송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 기상으로 치솟아 있다.
전남 해남에 있는 이곳 녹우당은 사적 167호로 해남 윤씨의 종가 연동으로
호남지방 사대부의 대표적인 가옥이다.
이곳은 고산 윤선도가 시작에 정진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녹우당에서 추원당으로 가는 뒤안길 담장에는 고산 윤선도의 시상이 되기도 하지 않았을까.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구름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게 들려 좋기는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끊어질 적이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곧 져 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 빛을 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날씨가 추우면 나무의 잎은 떨어지는데,
소나무여, 너는 어찌하여 눈이 오나 서리가 내리나 변함이 없는가?
그것으로 미루어 깊은 땅 속까지 뿌리가 곧게 뻗쳐 있음을 알겠노라.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또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저리하고도 네 계절에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다 바추니
한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의 벗인가 하노라
이시는 고산이 56세 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로,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쓴 오우가 이다. 고산은 이렇게 여기에 은거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비유하였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녹우당 앞에는 수백년을 뿌리 내리고있는 은행나무가 있다.
바람이 불면 뒷산 비자나무 숲에선 쏴 하는 소리가 비가 오는 듯하고 이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푸른 은행잎이 마치 비오듯 한다 하여 綠雨當(녹우당)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해남 윤씨의 종가 녹우당에서 차를 타고 20여분 달려 도착한 곳이 진도였다.
맑고 잔잔한 바닷물과 점점이 흩어진 푸른 섬들로 유명한 '다도해 국립해상공원'은 우리 나라
육지의 서남쪽 끝인 해남을 중심으로 볼 때 남쪽의 완도군과 서남쪽의 진도군, 그리고 서쪽의 신안군
일대로 이루어 진다.
진도는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큰섬으로 섬 주변에 어패류와 해조류가 풍부하고
비옥한 토지와 뛰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진도라고 불리어 졌다고 한다.
이곳 진도대교가 놓아진 곳이 울돌목이다.
바다가 울며 돌아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좁은 해협을 관통하는 물살이 급류를 이루고 서남해안을 싸고 도는 바닷길의 길목이기도 하다.
이곳은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조수의 흐름을 이용해 큰 승리를 거둔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물살이 너무 세차서 다릿발을 세우기 어려워 양쪽 기슭에 기둥을 세우고 강철선을 늘어뜨려 구조체의
중심으로 올가매는 공법으로 시공된 다리가 진도 대교이다.
진도 금골산 오층석탑
금골산은 예로부터 [진도의 금강산]이라 불리어지는 명산이다.
일명 상골산이라고도 불리며 해발 193m로 높지 않은 산이다.
금골산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석수가 수만년을 걸려서 예술품을 조각해 놓은듯 했다.
산세를 따라 구멍이 나있고 구멍인가 하면 기둥이고, 사람인가 하면 짐승의 형상으로 보여졌다.
기암의 빛깔도 황색,흑색,백색,회색등으로 이루어져 그 아름다움을 더했다.
금골산 아래 둥지를 틀듯 금성초등학교가 자리한 이곳에 보물 제 529호으 금골산 오층 석탑이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곳 지금의 초등학교자리에 해월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절에 속했던 석탑으로
지금 자리한 곳이 원래의 위치로 짐작되어 진다.
진도 대교를 건너 차로 20여분 걸리는 이곳 첨찰산 자락에는 운림산방과 쌍계사가 위치하고 있다.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지붕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려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림 산방은 조선후기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는 진도의 대표적인 인물 소치 허련이 말년에 한양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쳐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이다
당시 운림산방은 운림각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수해전 개봉한 배용준 주연의 스캔들 촬영지 이기고 하다.
을씨년 스런 오후
첨찰산 자락에 위치한 쌍계사 가는 길목에는 아직 겨울의 냄새가 났다.
융장 산성
진도 동북방의 벽파 나루와 서낭산의 주변에 솟은 산지와 안부를 따라 연장 12km이상의 거대한 도성지이다.
융장리와 벽파리의 거의 전체를 감싼 고려시대의 석축과 토축으로 된 나성 형식의 산성으로
해발 264m의 융장산 능선을 따라 약간의 석축이 남아있고 성내의 융장자지와 행궁터가 남아 있었다.
이곳 융장산성은 1270년 배 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융장 산성의 행궁터는 1989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삼별초가 이곳을 사용하기 위하여 이미 불찰이 있었다고 여겨지며, 경사진 대지에 석축을 여러 단으로
구성하고 남북 방향을 축으로 하여 회랑을 가진 여러개의 건물이 배치 된 것이 마치 재경의
만월대와 유사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융장성은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 석성과 함께 삼별초의 대몽항쟁의 유적지로 좋은 자료로
축성 연대가 확실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융장산성의 조감도
[울돌목의 낙조]
바다가 운다고 하여 명량이라 이름되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사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 325m 가장 깊은 수심은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그러니까 8km밖에서도 들린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임진왜란 당시 4백여척의 왜적에게 참패를 안겨준 커다란 요인이
되기도 한것 같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위로 아치형의 진도대교 허공을 가르고 역사의 아픔을 씻기어 가듯
노을이 지고 있었다.
[ 명량대첩 공원의 동상 : 충무공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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