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리지 못 한 풍경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 초의선사의 삶의 흔적을 찾아서[일지암] 본문
하루 일정을 빠듯이 소화해내고 강진에서 일박을 하게 되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며 김주락 이사장님은
소맥을 제주해 건내주시며 " 반 프로 세잔은 먹고 시작해야지"
연속으로 세잔을 건내주신다.
식사를 마치기도 전 소맥 석잔을 빈 속으로 채워넣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저녁 식사자리에서 반주라 할 수 없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어내고 식당을 빠져나올때 쯤 취기가 올라
두볼에 울긋불긋 단청(丹靑)을 드리워 기분이 알싸하다.
나즈막한 건물이 인상적인 70년대의 옛 모습이 고요함으로
작은 시골읍내 밤풍경을 만들어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두볼을 쓰다듬는 밤 공기가 훈풍으로 불어 남쪽의 정취에 취해 갈쯤,
서울에서 늦게 출발하신 김교수님과 유박사님 그
리고 주원장님이 강진에 도착하셨다.
식사를 마치고 조출한 음주가무에 흥에 겨워 취하고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움에 취해 숙소로
돌아오는 작은 도시의 밤 거리가 시끌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둔한 내가 인원확인을 제대로 못해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작은 한실(韓室)에 여섯명이 한방이란다.
작은 방바닥에 요(褥)를 겹쳐 깔고 고양이 낯바닥 씻듯 물칠하여 양치하고
"코 고는 사람은 들어 복도에 내놓을꺼야 "
김대표에게 말을 건내니 받아 치기를 "당신도 골아 !" 하며 소등에 들어 간다.
우리는 군 내부반에 담요를 깔듯 각자의 침구를 챙겨 나란히 자리를 잡아 누웠다.
나는 조금더 편히 잠을 자겠다고 창가 아래 구석진곳 벽에 바짝붙여 이불을 깔았다.
소등을 하고나니 누군가는 한사코 한잔 더해야 한다며 어린아이 잠투정하듯 한다.
여섯명을 한방에 모아 놓으니 여기서 한 소리를 하면
사방에서 댓글이 달리듯 대꾸가 날아들어 '까르르르' 폭소가 터지기를 몇번
" 내일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니 이제 잡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잠들이 들었나 싶었는데
맞은편의 벽쪽이 희미한 불빛이 이불에 투영되어 환하다.
주원장님이 문자를 보내신다고 휴대폰을 꺼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문자를 보내신 단다.
누군가 "불끄고 잡시다" 하니 " 아직 열한시도 안되었는데 고삐리도
아니고 벌써 자냐"하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불을 켜는 바람에
방안은 요절복통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후담은 이렇다
주원장님이 잠자리에 들기전 가족에게 '여기는 11시도 안되었는데 잠 자래' 문자를 보내니
답이 오기를 '고삐리처럼 도망가지 말고 어서 자!'라고 답이 왔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내복 차림의 여섯 남자가 둘러앉자 수다를 떨다
야식집에 맥주와 야식을 시켜 먹으며 수선스런 분위기에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쳐가며 '깔깔깔' 배꼽을 찾아 헤메다 지쳐 잠이 들었다.
아침 7시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나서
해남 두륜산(頭崙山)자락 대흥사와 일지암 답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해남읍내를 지나 두륜산자락에 다다르니
소설(小雪)이 소리없이 소복소복 산자락을 덮는다.
두륜산 입구 동백나무 숲의 터널을 지나 송림이 우거진 부도숲에 잠시 머물다
일주문을 지나, 표충사를 지나고 30여분 오솔길과 같은 산길을 오르면
초의선사 생전 삶의 터전였던 작은 초가의 일지암(一枝庵)에 다다른다.
여름날 푸르름과 가을날 화려함을 미련없이 떨구어내고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가 매서운 겨울을 끌어안고 잠들어
고요한 산사의 숲은 폴싹이는 바람소리도 소란하다.
사르르 사르르 싸리눈이 좁쌀갱이 처럼 조리대 잎에 떨어져
일지암으로 향하는 숲속길 적막을 깨치우고 하얗게 쌓여가는 눈길을
조심 조심 걸으면 고요한 산사의 풍경이 온 몸으로 녹아 든다.
그 옛날 초의선사가 덧없는 세상살이를 속세에 내려놓고,
풀섶으로 납루한 옷을 지어 입고 지팡이 하나 쥐어들어 여생을 보내며
오르내렸을 이곳 일지암으로 가는 길은 하염없는 싸리눈발이 낯선 이방인을 맞이한다.
부족함도 없고 더함도 없는 자연과 선(禪)의 사상을 찾아 떠나는 숙연한 행로의 시작이다.
일지암에 오르면 대흥사를 둘러싼 두륜산 계곡이 한눈에 들어 찬다.
일지암은 대흥사의 13대종사 중 마지막 대종사인 초의선사가 39세( 1824년 숙조24년)지어
1866년 (고종3년) 81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여생을 지낸 암자로 한국전쟁으로 방치되어 있다가
1979년 복원된 우리나라의 차(茶)문화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일지암은 초당과 다정 그리고 최근에 세워진 대웅전과 조그만
요사채,선방등의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일지암은 암자
전체의 이름이기도 하고
초가정(草家亭) 한채의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일지암에는 옛 정취를 그대로 엿볼수 있는 차나무가 둔턱아래 자라고 있고,
선다를 의미했던 다정 그리고 뒤편에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샘이 대나무 통에 연결되어 흐르는데 이곳은 다천(茶泉)이라 한다.
또한 일지암의 측면과 앞마당에 돌 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를 비롯하여
작은 연못과 좌선석(座禪石)등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놓았다.
일지암의 이름은 초의선사가 대둔사(지금의 대흥사)
본당 쾌년각에서 지내다가 이곳 두륜산 기슭에 띳집(지붕을 띠로 엮은집)을 지어
거쳐로 삼고 중국의 당대사 한산(寒山)의
시조에서 일지(一枝)라는 글을 취해 일지암이라 칭하고
뱁새는 항상 한 마음로 살기때문에 한 가지만 있어도 편하다
(想念鷦鷯鳥 安身在一枝)라는 글을 남긴다.
초의는 운흥사 차나무 군락지에서 씨를 받아 일지암 주변에 뿌리고
일지암 뒤편 돌틈에 나오는 샘을 보수해 유천(乳泉)이라하고
작은 연못을 조성하여 화단을 만든뒤 차를 우려 선(禪)을 실천하며
불경을 읽고, 시(詩),서(書),화(畵)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초의선사의 시집 [일지암 시집]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당시의 풍경을 엿볼수 있다.
장춘동(長春洞)은 두륜산의 일 지맥이 용과
호랑이의 형상(좌청룡,우백호)을 이룬 곳이다.
이곳에 초당을 지으니 일지암이다.
삼 칸 초당에는 초의 스님과 동자 한 사람뿐,
법상(法床)에는 부처님을 모셨다.
아침의 목탁소리와 샘물소리, 댓잎 스치는 바람소리는 거문고 소리와 같다.
축대를 쌓아 과원(果園)을 만들고 석간수(石澗水)는 대나무로 받아 찬물을 끓인다.
남은 물은 연못에 흐르게 하고 연못 위에는 나무 시렁을 만들어 포도 넝쿨을 올렸다.
정원 주변도 괴석으로 꾸몄다.
초의는 서화에도 재주가 남달라 일지암은 여백의 미, 한국 남종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한국 남종화의 대가 소치(所痴) 허련이 초의선사에게서 남종화의 기본을 다진 후
초의선사의 추천으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들어가
엄격하고도 혹독한 그림 수업을 받아
그는 우리나라 남종화의 대가로 자리 매김하게 되어
그 명성이 4대에 걸쳐 남종화의 맥을 이어간다.
진도 쌍계산 아래 운림산방에는 소치 허련(허유)
집안의 가계 업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소치의 몽연록(夢緣錄)에는 초의선사와 같이 생활하던
그때 일지암의 풍경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지암은 산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자와 달리 그 구조가 특별했다.
주춧돌은 모양이 일정치 않은 잡석이며, 기둥은 소나무의 외피만 벗긴 채 다듬지 않았다.
서까래는 차양이 없고 울퉁불퉁한 평고대가 받치고 있다.
추녀는 반듯하게 뻗어 있었는데 잡아 올리지 않았고, 지붕은 볏집이었다.
언뜻 보아 짓다만 암자 같았다.
그러나 주변 경관은 천하일색 이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 무성한 곳에 두어 칸의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다.
솔가지는 처마를 스치고 초가 흙집 주위에는 노란 산 국화가 피어 있었다.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리면서 들 복판에 판 연못 속에서 아른거렸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다(茶) 절구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초의선사의 시에도 일지암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鑿沼明涵空界月 [ 착소명함공계월 ] / 연못을 파니 허공의 달이 환하게 담그어지고
連竿遙取經雲泉 [ 연우요취경운천 ] / 낚시대를 던지니 구름 샘까지 통하는 도다.
碍眼花枝剗却了 [ 애안화지잔각료 ] / 눈을 가리는 꽃 가지를 꺽어 버리니
好山多在夕陽天 [ 호산다재석양천 ] / 석양 하늘가에 아름다운 산이 맑기도 하구나.
나는 그 초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거처를 얻은 셈이다.
소치 허련의 몽연록 중에서
당시 소치는 일지암에 머물며 거처는
허름하나 아름다운 풍경에는 불만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일지암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과히 천하일색이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짓고 5년쯤 지나 일지암을 다시 보수하여
단장하며 일지암을 예찬하니 그의 시를 보면 이렇다.
짙은 안개 덮여도 옛 인연은 끊을 수 없으니
중 살림 할 만큼 편안한 몇 칸 집을 지었네
연못을 파서 밝은 달 비추이게 하고
대나무 통 이어 멀리 백운천 취했나니.
초의선사(1786년~1866년)는 전남 무안 출신으로
속세의 성은 장(張)씨이고 본관은 흥성이다.
속세의 이름은 중부(中浮)로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호는 초의(草衣)이다 1786년(정조10년) 4월 5일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에서
장삼천의 3삼으로 태어났다.
5세가 되던해 강변에서 물놀이를 하다 물에 빠진것을 지나던
스님이 건져준 것이 인연이 되어 1800년 15세의 나이로 나주 운흥사에서
벽봉민성(碧峰敏性)을 스승으로 삼아 출가한다.
법명 의순(意恂)은 벽봉이 내린 법명으로 '진실한 사람이 되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초의는 이곳 운흥사에서 처음 차(茶)를 접하게 된다.
초의가 19세가 되던해 영암을 지나던 중 월출산의 수려함에 반하여
산등성이에 오르니 해는 저물고 마침 바다에서 떠오르는
환한 보름달을 바라보니 가슴속에 맺혔던 답답함이 말끔히 가셔 '
달은 공(空)인데 달은 가득 차(滿) 있도다.'를 깨달아 그후
겁도 없어져 거침없는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태몽이 예사롭지 않은데 초의를 잉태한 후
초의선사의 어머니는 ' 큰별이 품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초의선사와 돈독한 관계를 지낸 신헌(申憲)이
초의선사 입적 후 [사호보 존제자 초의대종사 순탑비명]에 기록하였다.
초의(草衣)라는 법명은 대흥사 10대 강사 완호윤우(完虎尹佑)가 내린
법명으로 완호의 수제자 법명을 살펴보면 호의(縞依;명주옷),
하의(荷依:연옷), 초의(草衣)가 있었는데 이 셋을 삼의(三衣)라 한다.
이 기록을 읽으며 참 취미도 별난 재미난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의란 법명은 이해가 가지만 호의, 하의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함이 발하였다.
초의(草衣)라는 법명의 유래는 여러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그 견해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고려 야운선사(野雲禪師)의 자경문(自警文)에서 유래 하였다는 견해이다.
나무뿌리와 나무과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솔잎과 풀 옷으로 벌거숭이 알몸을 가린다.
여기서 초의(艸衣)란 풀옷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중국의 사략(史略)에서 취했을 것이란 견해이다.
움집을 만들어 나무가지를 엮어 보금자리로 삼고,
나무열매를 따 먹고 풀옷을 입고 살아도 즐겁다네
여기서도 풀 옷이란 의미가 나온다.
3. 신헌(申憲)의 [ 초의대종사 탑비명]의 기록을 근거한 견해이다.
초의는 그 염화의 이름이다.[ 草衣其拈花之號也]
4. 김명배의 '초의선집'에 의하면 당나라의 용아화상(龍牙和尙)은
용아산(龍牙山)에서 '푸른산과 물을 벗 삼아 살며 풀 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초의선사의 글에도 '과일을 먹고
풀 옷 차림이어도 마음은 달처럼 밝다.'는 글귀가 있다.
한 평생 무념(無念), 무애(無涯)하지 아니하고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초록빛 산이 내집이요.'
그러나 초의의 법명은 초의외에도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초사(草師), 병석(甁錫),선송(禪誦),병발(甁鉢), 선황(禪況)
해옹(海翁), 해양후학(海陽後學),
우사(芋社), 자우(紫芋)등의 호가 더 있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불가에 몸 담고 있었으나, 그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등 당대의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은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24세 연상의 다산정약용,
동갑내기 갑장의 추사 김정희, 홍현주, 석주형제, 윤정현
권돈인, 자하, 신위,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형제,
산천 김명희, 신헌등을 비롯하여 그 제자 남종화의 대가 소치에
이르기 까지 지금으로 말하자면 마당발인 셈이다.
1809년 다산 정약용이 47세의 나이로 강진에 유배되어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도움으로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자
초의는 다산을 찾아가 다산에게서 유서(儒書)를 빌려 읽고 시부(詩賦)를 익히고
다산에게서 역학을 배웠다.
이때 다산은 처음으로 초의에게서 다도을 알게되어 다도에 빠져드는 계기가 된다.
다산이 동다기(東茶記)를 집필하게된 동기가 초의선사의 영향이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생활 중 초의선사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이때 초의선사의 나이가 23세가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후 귀양살이가 풀려 고향 마재로 돌아간 정약용을 만나기 위해
초의선사는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지금의 운길산 수종사에서
정약용과 차를 함께 나누어 마시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의선사는 동갑내기였던 추사 김정희와는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두사람은 서화에 취미가 같고, 차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두사람의 우정이 더욱 돈독했던것은 아닐까?
초의는 매년 햇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보내고 추사는 그 답례로 편지를 자주써 보내며 둘만의 우정을 쌓아갔다고 한다.
추사는 초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차를 보내달라 체촉하였는데 그 내용이 사뭇 재미가 있다.
인편으로 편지를 받으니 선사가 사는 산중이나 내가 사는 이곳이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늘을 이고 그리워하면서도 어찌해서 지난날은 그처럼 격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세밑 추위가 기승을 부려서 벼루 물고 술을 얼리고도 남을 정도랍니다.
선사가 사는 남쪽은 들판에서도 이런 일은 없겠지요.
그러니 따뜻한 암자 속에서 이겠습니까.
요새 청아하고 한가한 복을 입어 방석과 향등(香燈)이 한결같고 가볍고 편안하신지요?
그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몸은 계속 서울에만 있으니,
설이나 지내고 봄이 오면 다시 한 번 호남으로 갈 신과 지팡이를 매만질까 합니다.
차는 이 갈증이 난 폐부를 적셔 주어 좋지만 얼마 되지않는 것이 한입니다.
향훈 스님과 전에 차에 대해 약속했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지.
부디 이 뜻을 전하고 차 바구니를 뒤져서라도 봄에 이리로 오는 인편에 보내 주면 고맙겠습니다.
글씨 쓰기도 어렵거니와 인편도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그런데 새로 딴 차는 왜 돌샘과 솔바람 속에서 혼자만 즐기면서 먼 곳에 있는 사람 생각은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서른 대의 매를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려.
글을 읽다보니 초의가 추사에게 차를 보내지 않아 서른 대의 매를 아프게 맞게 생겼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참으로 재미난 글이라는 생각에 옮겨 보았다.
추사는 제주 유배길에 부러 대흥사에 들러 초의와 하룻밤을 함께 지새며 차를 마실 정도로 초의선사와 차를 좋아 했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다섯 차례나 유배를 떠난 추사를 만나려 제주를 찾아가 때론 6개월 정도를 함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추사는 초의가 만든 곡우차를 천하제일의 차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나도 그맛이 사뭇 궁금해진다.
추사 김정희가 1856년(철종 7년) 10월 71세의 나이로 과천 청계산 아래서 세상을 뜨자 초의선사는 '완당김공제문'을 지어 올리고
1866년 (고종3년) 8월2일 80세(법랍 65세)의 나이로 일지암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입적한다.
서보석 변호사님의 일지암 특강이 끝나고 일지암을 내려오는길 싸리눈이 짖굳어
언덕길은 미끄러운데 초의선사의 덧없는 삶에 대한 심정 탓인가 ? 눈 언저리가 시렵도록 차겁다.
타오르는 욕망과 탐욕의 불꽃을 삭히지 못하고 손 아귀에 쥐려고만 애를 쓰니 세상은 소복 소복 쌓여가는
소설(小雪)처럼 번민과 고뇌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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