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리지 못 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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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국립공원

계룡산 갑사에서

緣佑(연우) 2011. 11. 16. 23:51

새벽까지 웃음꽃을 피웠던 수다스러움이 차갑게 이슬로 내려져 아침이 밝아왔다.

산 아래에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라 바다를 이루는듯 했다.

불편한 잠자리를 털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한사람씩 텐트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듯 먼나먼 화장실을 찾아 세면도구를 들고 언덕을 내려갔다.

나도 수건한장에 치솔을 들고 세면장으로 향하며 속으로 "먼놈의 캠핑장이 이모양이라냐?" 불만을 토로했다.

 

 

 

조금 편하게 잠을 자겠다고 차에 잠자리를 펴놓았는데 이곳에서 놀던 진경이와 영은이에게 빼앗겨 결국은 좁은 공간에서

셋이서 함께자야 했다.

아이들에게 세수 안한 얼굴좀 찍자고 했더니만 까투리 숨바꼭질하듯 머리를 숨겨버린다.

 

 

자옥한 안개가 이슬비처럼 내려 시야마져 가로막고 섰다.

캠핑장 이곳 거곳에서 아침을 준비하는지 시골마을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듯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서야 할 신세인지라

남은 김치와 부식거리, 그리고 고기몇점을 넣고 이교수님이 맛난 찌개를 준비해 모두의 수고를 덜어주셨다.

누구 덕분에 꽁보리밥이기는 했지만, 맛난 찌개를 국거리 삼아 국밥으로 허기진 배속을 채우며 다들 한마디씩 거들고 나선다.

"아 ~ 꽁보리밥!"

" 방귀는 잘 나오겠다"

 " 누구는 내차에 타지마 !" 

건내는 농담 한마디에 웃음꽃이 핀다.

 

 

꽁보리밥..

그래도 맛나다며 다들 빡빡 긁어 맛나게 식사를 마친듯 하다.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는  이교수님이 스팸도 굽고, 찌개도 끓이고, 계란 후라이도 준비한 덕분에 많은 식구가 빠른시간에 민생고를 해결할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침 모닝커피 한잔에 밤새 풀어놓았던 수다들을 재방송하며 "깔깔깔" 재미난 아침식사를 마친다.

 

 

 

 

 

오늘의 답사일정은 계룡산의 갑사, 공주의 공산성, 석장리 구석기 유물등이 예정되어 있었다.

차에 캠핑장비를 테트리스하듯 구겨 실고 계룡산의 갑사로 향한다.

춘마곡 추갑사라 했던가?

봄에는 마곡사의 경치가 수려하고 가을에는 갑사의 경치가 으뜸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갑사는 제일, 으뜸, 최고,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계룡산의 서쪽에 위치한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원년420년)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또한 임진왜란때는 영규대사가 의병을 일으켜 이곳 갑사에서 800여명의 승군을 조직하고 조헌 장군과 함께 청주성을

최초를 탈환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영규대사는 이후 금산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해년마다 갑사에서는 영규대사와 800여명의 승군들의 넋을 기르기 위한 진위장군 기허당 영규대사의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갑사로 향하는 길 일주문에 계룡산 갑사라는 현판이 우리를 반긴다.

고목들이 열병을 하듯 양옆으로 즐비하다.

통일 신라시대에 신비스럽고 웅장한 산을 두고 신라오악이라 불렀는데 계룡산은 그중 하나의 명산이다.

동쪽의 토암산, 북쪽의 태백산,남쪽의 지리산, 중앙의 팔공산, 서쪽의 계룡산을 두고 신라오악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진다.

계룡산이란 지명은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는데 무학대사는 금계포란, 비룡승천,이라하여 황금닭이 알을 품고,용이 승천하는

산세를 가지고 있다하여 계룡산이라 불리어 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일주문을 지나 전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다시 갑사로 발길을 옮겼다.

여름내내 쏟아지는 폭우을 맞이했던 고목들이 가을향연이란  축제를 마치고 사라져 나목으로

겨울맞이에 나선다.

이제 이곳도 얼마후면 차곡차곡 쌓이는 눈발속에 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맞이 할것이다.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져간 가을이 몹내 아쉬움을 더해주는 갑사의 풍경이 떨어진 낙엽속으로 묻혀갔다.

 

 

한참을 조잘되던 아이들은 목이 타는지 약수물 한바가지를 벌컥거리며 목을 축인다.

약수터 주변은 아직 떠나지 못한 가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 몸서리를 치듯 아름다운 자태에 빛을 더했다.

울긋불긋, 푸르른 잎새가 어울어져 문턱까지 몰아닥친 겨울을 야속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붉은 단풍발...

아마도 김영랑시인이 보았더라면 "오메 단풍들것네"를 연신 읊퍼되지는 않았을까.

그다지도 몸부림치듯 서있는 가을자락을 뒤로하고 길을 제촉했다.

 

 

 

길모퉁이를 돌아 산에 들어서니 산은 이내 겨울풍경을 품는다.

계집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수다를 엿들은 산새가 뽀오얀 안개길 꿈속을 걷는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앙상한 나목속을 헤집고 내려앉았다.

 

 

아이들은 소원을 빌어본다며 돌탑위 작은 돌을 주워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돌탑위 아직은 세상 물정도 몰라 순박한 아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갑사로 향하다보면 중간에 철주로 된 당간지주를 만나게 된다.

당간이란 법당 밖에서 불교의식을 거행할때 예불용 그림(괘불)을 달아두던 높은 깃대로 오랜 세월과 전쟁등으로 많은 당간지주가 훼손되거나

없어졌다. 더러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어 그곳이 그 옛날 절터였음을 알수있다.

이곳 당간의 깃대는 철로 제작된것이 특징인데 제작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이다.

이렇게 철로 제작된 당간지주는 청주의 용두사터, 나주 동문밖의 석당간 그리고 이곳 계룡산의 갑사에만 현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유물이다.

이곳 당간 지주의 규모는 너비 47cm, 두께 59cm, 지름50cm로 지주의 높이는 3m, 당간의 높이는 15m에 이른다.

석주와 지주등이 원래 설치된 장소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윗면의 접착부분이 두장의 돌로 결구시키는 쇠못이 그대로 남아있을만큼

보존이 잘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갑사 철당간지주의 강의를 마친 일행들이 단체 사진을 찍으면 돌계단이 걸터앉았다.

뒷 배경으로 아직 추색이 만연하다.

갑사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

행락객들이 인산 인해를 이룬다 .

아이들의 호기심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르"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제 갑사의 답사를 마치고 공주의 공산성을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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