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그 뒤안길

양구 금단의 땅을 찾아 떠난 여행

緣佑(연우) 2013. 6. 27. 18:21

 

▲ 두타연

 

" 잊혀진60년의 세월을 찾아 떠난  양구 여행길"

 

덥지근한 공기가 회색빛으로 난무하는 도시였다.

차량들로 꽉꽉 메워진 듯 한 도로위를 헤집고  평소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 탑골공원에 도착했다.

오늘은 무료급식 봉사활동이 있는 날이다. 

원각사에 도착하니  한쪽에선 '덜거럭' '덜거럭' 설거지를 하고, 한쪽에서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나누어 주느라 정신이 없다. 

비지땀을 흘리며 경내에 들어서니  이마에서 흐르는 것이 비지땀인지, 진땀인지 분간이 가질 않은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앞치마를 두른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난 시간은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 였다.

다른 친구들을 이곳 탑골공원에서 만나 양구답사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아직 출발하기 전이라 했다.

담배 한대를 깨물며 " 차가 많이 막혀 이 곳까지 오려면 시간 꾀나 걸릴건데 " 혼잣말로 지껄이다 다시 전화를 걸어  반포팀은 그곳에서 바로 출발해

가평 휴게소에서 만나자 연락을 하고 출발을 했다.

 

해가 떨어질녘 양구에 도착하니 하늘이 잿빛이다.

" 비 올것 같은데 "

" 아니야 비온다는 말을 없었어"

김대표가 맞장구를 친다. 

" 바람에서 비 냄새가 나잖아 "

" 재주도 좋아 " 

"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양구 중앙시장 앞 주차장에 들어 찬다.

중앙 시장 입구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오늘은 늦게 도착해 별 다른 일정없이 고기를 굽고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맥주한잔에 수다 떠는 것이 일정이였다.

그렇게 별스럽지않게 숯불을 지피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빛방울이 떨어졌다.

"하늘도 무심하지 밥이나 먹고 비가 오던가."

"지나가는 소나기야"

김대표가 또 한소리 거든다.

숯불을 지피고, 상추를 씻고 고추,오이,깻잎을 준비해 식단을 마련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나온다.

집에선 해달라 성화를 부려도 않해줄 사람들이 스스로 수돗가에서 저녘준비에 부산하다.

 

저녘을 먹고 펜션앞 천문대까지 산책에 나섰다.

비가 내려서인지 밤공기는 샤워를 마친듯 산뜻했다. 천문대로 향하는 논두렁길은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을 채우고

작은 길가 조성해 놓은 자전식 램프가 희미한 불빛으로 한적한 시골마을 경치를 더해준다.

언제 걸어보고 걸어보지 못한 길이던가 이 작은 논두렁길을 ....

배꼽마을 밤 풍경은 하루살이 때가 금새라도 꺼질듯 깜박이는 희미한 램프를 맴돌고,  지칠줄 모르고 울어되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낯선 이방인들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허공속으로 공명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침 6시30분쯤이나 되었을까 ? 한 사람 두사람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제 준비한 부식에 대충 아침식사를 마쳤다.

서둘러 여장을 챙기고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문명의 침범이 없었던 60년의 세월  금단의 땅 - 양구 두타연"

 

6.25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미,소,중 세나라에 의해 155마일의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우리에게서 잊혀져 갔던 두타연이다.

휴전선이 그어지고 그 이듬해 2월 미 육군사령관의 직권으로 비무장지대 바깥쪽에 민통선(민간인 통제구역)만들어 지면서 금단의 땅이 되어버린 두타연

 

타연은 금강산에서 흘려내려온 물줄기가 바위사이를 헤집고 형성된 약 10m의 폭포와 소(沼)를 일컫는다.

병풍처럼 소(沼)를 둘러싼 커다란 바위가 금강산에서 치닫는 물줄기를 끌어 안은체  문명의 이기와 협상하지 아니하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

60여년의  세월속 꼭꼭 숨어 있던 두타연이 일반인에게 공개된것은 2004년 양구군이 둘레길을 조성하고 지뢰를 제거해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면서였다.

60여년 동안 사람들 관심에서 잊혀졌던 두타연 둘레길엔 철책으로 출입을 엄금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아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사방이 지뢰밭 천지라고 안내 장교는 말을 덧 붙인다.

 

타연은 오전 10시와 오후 3시, 하루 두차례 일반인에게 공개되며 출입은 사전에 승인을 득해야 한다.

출입허가 신청은 3인이상 단체일 경우, 양구군 홈페이지 문화관광과에 접속해 신청하고 개인의 경우는 당인 양구군 명품관에서 신청하면 된다.

 

구군청 홈페이지 : http://www.ygtour.kr/

 

 

 

 

 

 

 

 

 

 

 

 

 

 

 

 

 

 

 

 

 

 

 

 

 

 

 

 

 

 

 

 

 

 

 

 

 

 

 

 

 

 

 

 

 

 

 

 

 

 

 

 

 

 

 

 

 

 

 

 

 

 

 

 

 

 

 

 

 

 

 

 

 

 

 

 

 

 

 

 

 

 

 

 

 

 

 

 

 

 

 

 

 

 

 

 

 

 

 

 

 

 

 

 

 

 

 

 

 

 

 

 

 

 

 

 

 

 

 

 

 

 

 

 

 

 

 

 

 

 

 

 

 

 

 

 

 

 

 

 

 

 

 

 

 

 

 

 

 

 

 

 

 

 

 

 

 

 

 

 

 

 

 

 

 

 

 

 

 

 

 

 

 

 

 

 

 

 

 

 

 

 

 

 

 

 

 

 

 

 

 

 

 

 

 

 

 

 

 

 

 

 

 

 

 

 

 

 

 

 

 

 

 

 

 

 

 

 

 

돌산령을 넘어 해안면 펀치볼 가는길

산령을 넘어 펀치볼로 가는 길은 굽이 굽이 산길을 넘어야 한다.

1100m의 산등성이 고갯마루에 오르면 여의도 면적의 6배가 넘는 커다란 화채그릇 모양의 분지가 펼쳐진다.

한국전쟁 당시 움푹파인 분지의 지형이 화채그릇처럼 보인다고 해서 외국의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  펀치볼(Punch Bowl·화채그릇)

때문에 지금은 그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듯 해안면은 펀치볼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951년 여름 40여일간 주인이 6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던 곳. ‘피의 능선(Bloody Ridge) 가칠봉전투’(8∼9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전투’(9∼10월)로 불리는 격전이 치러지면서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을 합쳐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펀치볼엔 또 하나의 전쟁신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도솔산 전투이다.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 사이 16일간의 전투에서 한국의 해병은 133명의 희생자를 냈다.

도솔산 전투는 처음 미 해병대 제 1사단 5연대가 탈환임무를 부여받아 작전을 펼쳤으나, 희생자만 내고 탈환하지 못하자

당시 지휘부는 한국해병에게 1951년 6월3일 제 1연대장 (대령 김대식)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그 임무를 부여한다.

이에 한국 해병은 1951년 6월 4일 첫 공격을 시작하여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속에 16일간의 전투를 치르며 24개 고지를 전부 탈환한다.

이 전투에서 한국해병은 북한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하였으며, 개인 및 공용화기 198점을 공취하는 전과를 올린다.

때문에 도솔산 전투는 해병대가 산악전에서 유래없는 전공을 세운 해병대의 5대 전투신화 중 하나로 훗날 '무적해병'이란 별칭의 계기가 된다.

이는 당시 최적의 장비와 화기를 갖춘 미 해병도 점령하지 못한 전략적 요충지를 재래식 무기와 육박전으로 고지를 탈환한 해병대의 신념이기도 했다.

 

4땅굴과 해안면 펀치볼을 지나 을지전망대에 가려면 양구 통일관에 들려 출입절차를 거쳐야 한다.

출입허가는 당일 오후 4시까지 신청하면 땅굴 견학과 을지전망대 출입이 가능하다.

1990년 전방 GOP를 순찰하던 21사단 백두산 부대  병사에 의해 발견된 제4땅굴은 총 길이 2km 남짓한 규모로 군사분계선에서 1km 정도 남쪽으로 내려온 땅굴로

제3땅굴이나,2땅굴에 비교하여 그 폭이 비교적 작은 땅굴이지만 그 길이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침을 계획한 유래없는 땅굴이다.

당시 순찰중이던 병사가 땅속에서 나는 이상한 괴음을 수상히 여겨 이를 시추해본 결과 땅굴임을 확인하고 지금의 땅굴 입구에서 독일제 굴착기를 동원하여 하루 15m씩 15일 동안

공사를 한 결과 현재의 땅굴 모습이 드러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 4땅굴은 한국이 파들어간 암석으로 이루어진 석굴을 350m 걸어들어가면 북쪽에서 파내려온 땅굴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부터는 고도가 낮아 작은 전동레일에 몸을 실고

들었갔다가 후진으로 나오게 된다.

 

 

 

 

 

 

 

 

 

 

 

 

 

 

 

 

 

 

 

 

을.지.전.망.대

굴을 견학하고 다시 차량으로 10여분 달려 가파는 능선을 오르다 보면 검문소가 나온다.

검문소에서 신원을 확익하고 차량 보안검색을 받아 통행증을 교부받아 200여m 차량으로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북한땅이 가장 잘 보인다는

을지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선 펀치볼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는데 대부분 사진촬영 금지지역이라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을지전망대의 서쪽으로 가칠봉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산 꼭대기에 수영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전두환대통령 시절에 한국의 위상을 북한에 보여준다며 북한에서 가장 잘 보이는 지역인 가칠봉에 수영장을 만들고 이곳에서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를 했다는 말에

너털 웃음이 떠져 나왔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이를 본 북한에선 북한여군들이 나체로 폭포소에서 목욕하는 장면이 관측되기도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양구가 낳은 한국의 '밀레' '박수근' 미술관에서

 

지전망대에서 내려와 파로호를 가던길을 멈추어 잠시 박수근 미술관에 들러 그의 예술 혼을 엿보기로 했다.

1912년에 양구군 양구읍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광산업이 망가지면서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화가이다.

그의 그림 기법은  소박하면서도 서민적인 감성으로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화강암의 재질과 색조를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기법) 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수근은 평소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석탑과 석불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했다 한다.

이때문일까 박수근의 호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석(美石)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파로호 이승만의 별장지를 찾아서

 

수근 미술관을 빠져나와 마지막 목적지인 파로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지을 찾아 나서는 길은 좁은 폭의 굽이치는 도로를 약 12km 달려

월명에 도착해 그곳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어느덧 엷은 구름사이로 햇살도 서산에 걸리고 고즈넉한 파로호에 도착하니 푸른 물결이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파로호는 장마를 대비해 상당부분을 수위조절해  물을 빼고 수면이 상당부분 낮아져 있었다.

수면이 낮아진 파로호에 쌓인 모래톱을 걸어서야 선착장에 도착하니  우리를 태울 작은 쪽배가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다가선다.

작은 쪽배에 선장을 비롯해 10명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명조끼는 없습니까?"

질문에 사공은 빙그레 웃고 만다.

"니 수영잘하지? "

"걱장마라 잘한다"

"잘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구조를 할 줄 알아야지"

내심 걱정이 되었던지 친구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역하다.

그도 그럴것이 작은 쪽배에 옹기종기 성인들 10명이 올라타니 혹여 침몰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공은 그런 우리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 물결을 가르며 더 빠르게 수면을 질주했다.

 

로호의 원래 이름은 구만리저수지이다 .

일제잠정기 일본군은 전력을 얻기위해 수력발전소를 세우고 땜을 건설하는데 그 땜이 지금의 화천땜이다.

'파로호'란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6.25전쟁과 관련이 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후퇴를 거듭하던 인민군과 중공군은 이곳에서 제6사단 5연대 (당시 사단장 장도영)와 접전을 펼친다.

제6사단 5연대는  이곳에서  중공군 10,25,27사단 3개 사단을 몰살 시키고, 하루동안 3만8000여명의 전쟁 포로를 잡아내는 전공을 세운다

그 혁혁한 전공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을 깨뜨릴 파 (破), 사로잡을 로(擄) 호수호(湖)라는 의미에서 파로호라고 부르라 한것이 지금의 파로호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1955년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 월명낚시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별장을 짓고 종종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사실 지금 그 별장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엔 멋진 소나무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잡목만이 무성할 뿐이다 .

당시 상황을 고려해볼 때 당시는 이리 넓은 호수가 국내엔 없어 이곳이 아마도 특별한 지역이지 않았을까 싶다.

 

 

 

 

 

 

 

▲ 월명낚시터에서

 

 

 

 

 

 

 

 

▲ 이승만 별장을 찾아나서며

 

 

 

 

 

 

 

 

 

 

 

 

 

 

 

 

 

 

 

 

 

 

 

 

 

 

 

 

 

 

 

 

 

 

 

 

 

 

 

 

 

 

 

 

 

 

 

 

▲ 이승만 별장지의 전경

 

 위 사진 좌측 소나무가 있는 곳이 이승만의 파로호 별장지이다.

지금은 잡목이 무성하고 누군가가 그자리에 작은 움집을 져 놓고 이따금씩 찾아 오는 모양이다.

 

 

 

 

 

▲월명낚시터

 

 

 

 

 

 

 

 

 

 

 

 

 

 

 

 

 

 

 

 

 

 

 

 

 

 

 

 

 

 

 

 

 

 

 

▲ 서울로 돌아오는 길 춘천 구봉산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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