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을 넘어 영남대로 문경새재 옛길을 걷다
괴산의 화양계곡 입구에서 하루밤을 묵고
아침 일찍 화양구곡을 돌아 문경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숙소를 빠져나오자 어제 내렸던 빗물이 고인
웅덩이엔 살얼음이 얼어 살짝 아침 인사를 건낸다 .
벌써 4월 이건만 날은 왜 이리도 추운지 주머니에
언 손을 찔러넣고 화양계곡의 우암송시열 유적지를 찾았다.
계절은 봄인데 하늘은 청아한 겨울빛을 머금고
매서운 계곡 바람이 우리 일행을 맞이 했다.
오전 11시 경주팀과 합류하는 내화리
삼층석탑까지 갈려면 오전 시간이 빠듯했다.
아쉽지만 화양구곡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송시열 유적지와 화양1곡과 2곡을 스치듯 살피고
만남의 장소로 이동해 진흥원 식구들과 합류했다.
내화리 삼층석탑을 답사하고 문경으로 들어와 점심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의 주 목적지인 문경새재로 향했다.
문경새재 답사는 내몽골 민속촌 앞에서 시작하여 제3관(조령관),
제2관(조곡관), 제1관( 주흘관)까지 약 8km에 이르는 문경새재 옛길을
답사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유적지 설명을 포함해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될 예정이다.
내몽골민속촌 앞을 지나 조령휴양림을 경유해 제3관인 조령관까지
이르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로 지속적인 경사길이다.
조령관에 이르르러서야 문경새재 옛길( 영남대로)의 정취를 만난다.
조령관 앞에 이르러 김호상 박사의 답사 지도와 설명을 듣고
제3관의 성문을 지나니 과거로 돌아온듯한 착각에 빠질만큼 설레임과
장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문경새재는 (鳥嶺:642m) 백두대간 중 소백산맥 자락에 위치한
조령 산마루를 넘나드는 고갯길로 경상북도 문경과 충북 괴산의 연풍면을
구분하는 경계지점에 입지하고 있다.
옛길은 북쪽으로는 마역봉(925m)과 남쪽 조령산(1,026m)사이
계곡의 골짜기를 따라 형성되었으며, 옛날 영동의 추풍령, 단양의 죽령과 더불어
영남과 한양을 잇는 백두대간의 3대 고개 중
옛 선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로이다.
동래에서 한양까지의 도보로 걸리는 소요시간은
문경새재 14일, 죽령15일, 추풍령16일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문경새재는 영남지역의 보부상인과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이 주로 이용한 길인데 영남지역의
선비들은 반듯이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죽령을 넘으면
과서시험에서 '죽죽 미끄러져' 낙방을 하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라는 속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과거를 보러 떠나는 선비들에게는 문경새재를 넘어야
합격을 한다는 믿음이 강했는데 그 근거는
문경의 옛 지명이 문희(問喜) 였다는데서 찾아 볼수 있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좋은 소식을 듣게된다 하여
과거시험이 치러질 시기에 이곳을 넘는 선비가 많았다고 한다.
선비들은 과거에 떨어지고 조령을 넘는 모습을
백의조령(白衣鳥嶺)이라 하였는데, 영조실록에는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에게는
출세를 위해 반듯이 넘어야 하는 분수령으로 상징되었던 것 같다.
조령(鳥嶺)은 새도 날아 넘기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새재는
'새'(억새풀의 경상도방언)가 많은 고개라 하여 새재라 하였다는 유래도 있고,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새'(사이)재라는 설과
'새'(새신:新)고개 새로운 고개라는 등으로 풀이한 설도 있는데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풀이 많은 고개라는 의미의
초점(풀초:草,재점:岾)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중종25년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도 조령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 말기 징효대사(澄曉大師)가 891년
(진덕여왕5년)에 상주의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조령에
잠시 머물렀다는 내용이 영월의 흥녕사에 있는 그의 탑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조 초기(태종14년 1414년) 세곡을 운반하는 관통로이기도 하였다.
당시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남서해안 바다에서 자주 침몰하자
태종은 영남지방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을 낙동강을 이용해 배로
상주까지 운반한 뒤 육로(문경새재)로 통해 충주의 경창원에 집하하여
남한강을 이행해 배로 한양까지 운송하라 지시하였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떠오른다.
이는 1592년 4월13일 새벽 20만 대군을 이끄는 일본군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이 문경새재를 통해
도성(한양)으로 진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여일이다.
부산,동래,양산,밀양을 거쳐 청도,경산,대구, 그리고 4월25일 문경새재 앞
진안에 진을 친 고니시는 문경새재를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여겨
최대의 고비로 여겼으나, 당시 8,000여명의 군사를 이끌던 삼도
순변사 신립장군은 조령을 정찰하다 이미 일본군이 문경에 도착한것을 보고
문경새재를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자 고니시는 4월27일 밤낮으로
문경새재를 서둘러 넘어 다음날 정오 달천벌에 도착한다.
그리고 신립장군과의 전투에서 신립장군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이로인해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자
고니시의 군대는 도성까지 무혈입성하게 된다.
이후 선조는 문경새재 지금의 조곡관 제2관에 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1756년 영조 41년 여지도서에는 문경새재를 이르러
'하늘에 닿는 산세로 성곽을 이룬다' 지정학적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일맥은 주흘산이 되고 돌부리가 높고, 모든 봉우리는 깍은 듯 서 있다.'
'일맥은 조령이 되고 공정산으로 높아 그 산세가 하늘에 닿고,
주흘산의 서록과 함께 서로 맞대어 스스로 성곽을 이룬다.' 하여
천연요새임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철종12년 (1861년)에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해설하여 편찬한
대동지지에서도 전략적 군사요충지임을 덧붙이는 기록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경상우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대로이다.
매우 험하고 구불구불하여 양장의 구곡같아 경계는 남북으로 되었고,
경기와 호서 목이 되어 전란이 일어나면 지켜야 할 곳이다.' 라고 기록하며
지정학적 중요성을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
[책바위]
책바위는 동화원 휴게소와 제3 관문 사이 장원급제길(금이환향길)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쌓은 탑위에 사람 모양의 비석하나가 세워져 있고, 돌에는 종이들이 붙여져 있다.
이 책바위에도 전설이 전해지는데 옛날 문경새재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몸이 허약해
공부는 물론 아무일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부자는 도인에게 원인을 물어본 결과 집을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기 때문으로 담을 헐어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정성을 들여 기도를 드리면 된다는
말에 따라 3년여간 아들에게 담장의 돌을 문경새재로 나르게 했다.
돌을 나르다보니 허약하던 아들은 몸이 튼튼해지고 공부도 열심히 해
부친의 소원이던 장원급제를 하고 출세해 가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후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하나같이
장원급제의 소원을 이 책바위에다 빌며
과거길을 재촉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입시철이 되면 소원 성취를 비는 많은
수험생이 이곳을 찾기도 한다고 한다.
위 사진의 소나무 아래부분에 난 상처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한국인을 강제동원해 부족한 에너지로 사용하고자 송진을 채취하였던
가슴아픈 소나무의 상처라고 한다.
[귀틀집]
동화원에는 화전민이 살던 귀틀집이 남아 있다.
귀틀집은 주로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의 통나무 집으로
지방에 따라 방틀집·목채집·틀목집·투막집 등으로 불린다.
주로 산간지역의 화전경작지 취락에 분포한다.
지역적으로는 개마고원, 낭림산맥의 삼림이 풍부한 북부지역,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산간지방, 지리산 주변 소백산맥 일부지방,
울릉도 등에서 발견되나 중부 이북의 산간지대에 특히 많다.
재료로 쓰이는 통나무는 지름이 15~25㎝이며, 그 양쪽 끝에 홈을 내어
십자형 결구(結構)가 되도록 한다.
이런 방식으로 네 귀퉁이를 맞추어 차례로 쌓아올리고,
나무 사이의 틈새는 진흙으로 메워서 바람을 막는다.
귀틀집의 평면 구성은 방 2칸과 부엌 1칸의 3칸 형식, 또는 부엌 끝 쪽에
가축의 우리를 덧붙인 4칸 형식이 보편적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지붕의 재료로는 주로 너와·새·굴피·화피 등이 사용되며,
까치구멍·우진각·맞배 지붕 등의 여러 형태가 있다.
[ 바위굴 ]
새재를 걷다보면 서쪽에서 낮아지는 능선이 조곡천을 만나 소멸되고
다시 능선이 남쪽으로 낮아지는 곳의 20m 떨어진 곳에 자연석으로 형성된 바위굴이
있는데 이곳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 옛날 새재길을 가던 길손이 갑작스런 소낙비를 만나
이 바위굴에 들어오니 마침 과년한 처녀가 이 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어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졌다.
그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아 십수년이 흘러 아이가 성장하니
주변에서 아비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내력을 물은즉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여주고
아버지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 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방방곡곡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에서
세찬 호우를 만나 주막에 들었는데 먼저 들어 있던 중년의 선비가 말하기를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비(雨) 같구나.”함으로
이에 아이가 집히는 바가있어 “새 재 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은 즉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아이가 자신의 내력을 말하고
확인하니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어 아버지를 모셔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백년해로 한다는 설(說)이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처로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들어가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출입구를 통나무로 봉쇄해 놓았다.
그 옛날 무료한 새재를 걷다보면 이리 무료함을
달랠수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실일지 모르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조금더 구체적이고 재미나게 각색되어지지는 않았을까 싶다.
문경새재 아리랑비
문경새재 아리랑비의 글귀를 생각하며
송옥자여사의 노래가락을 담아 보았다.
[제2관 조곡관]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지키지 못해 한양성이 함락되는
치욕적인 수난을 당했던 선조는 1594년 영상 유성룡의 진언에 따라
이곳에 군사적 방어선을 구축하고 축성하게 된다.
[소원성취탑]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는 길손이 소망을 담아 돌을
하나,둘 쌓아 올려 이루어졌다는 소망탑이다.
당시에 이곳에 돌을 쌓으면 선비는 장원급제하고,
상인은 장사수완이 좋아지며,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은 그 세태와 정서도 많이 변하여
시험합격,재물,출생, 쾌유,가정의 행복등을 기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꾸구리 바위 ]
꾸구리는 용전 산소량이 풍부한 물살이 빠른 자갈바닥의
여울목에 서식하는 작은 한국의 토종 물고기 이다.
그런데 송아지를 잡아 먹을 만큼 크고 젊은 새댁이나
아가씨가 지나가면 희롱을 하는 꾸구리라고 하니 당치 않은 전설이지만.
그 옛날 새재를 넘나드는 남정네가 젊고 이쁜 처자의 말동무가
필요해 만들어 놓은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어찌되었든 젊고 이쁜 여자를 희롱하는 꾸구리라고 하니
젊고 이쁜 여자분들은 반듯이 건실하고 힘센 남정네를 동행해야 할 듯 하다.
그리 새재를 오르다보면 바위굴을 만나 그곳에서 깊은 인연도 맺어보고
우습게도 앞뒤 이야기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교귀정: 交龜亭]
교귀정은 조선시대 새로 도임하는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하는
관찰사가 이곳에서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장소이다.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일명:감사)는 도(道)의 경계에 도착하면
관찰사로서의 임무가 시작되므로 이를 도계(到界)라 하였다.
신임과 구임 감사의 인수인계는 도계 지점에서 실시되었다.
이 지점을 교귀(交龜)라 하는데 경상도 관찰사의 경우에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선인 새재 길의 중간지점인 이곳 교귀정에서 이루어 졌다.
교귀정은 1484년 (성종15년) 문경현감 신승명이 팔왕폭포 위에 세웠다.
약 500년간 존재하다가 한말 항일의병전쟁 때인 1896년 3월에
일본군에 의해 방화되어 소실 되었다가 1999년 6월에 정선의 [조령 용추도]등의
자료를 근거로 문경시에서 본래의 위치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 중창하였다.
이곳에는 조선 전기시대의 문신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의 이름을
교귀라고 짓고 진사 유순정의 시를 차운하여 교귀정의 경관을 읊은 칠언율시를
교귀정 옆 돌에 새겨 놓았다.
交 龜 亭 (교 귀 정)
佔畢齋(점필재) 金宗直(김종직)
交龜亭上倣乾坤(교귀정상방건곤) - 교귀정에 올라 천지간을 헤아리다...
不覺霜華點鬢根(불각상화점빈근) - 귀밑머리에 흰서리 침을 깨닫지 못하겠네.
一水宮商風自激(일수궁상풍자격) - 한줄기 흐르는물은 바람 더불어 음악소리,
千巖圖畵日將昏(천암도화일장혼) - 수천 바위 그림 같은데 어느덧 날은 저물어 가네.
詩因寫景窮飛鳥(시인사경궁비조) - 시 지어 경개를 그려보나니 나는 새는 어이할꼬?.
淚爲傷懷讓斷猿(누위상회양단원) - 눈물은 마음 아픈 탓, 단원(*斷猿)보다 더 슬프네.
南地已銷雙隻堠(남지이소쌍척후) - 남쪽 길 이정표위로 이미 어둠이 나리는데
月明今夜宿何村(월명금야숙하촌) - 아, 달도 밝은 이 밤은 어느 마을에서 묵을까...
조곡관을 지나 주흘관으로 향하는 길 용추로 향하다보면
왼편에 자리잡은 경관이 수려한 아늑한 주막이 나온다.
이곳은 1983년 조국순례자 연보도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 그대로 이엉을 얹어 초가지붕으로 복원하였다.
주막에는 안채와 우물, 화장실, 정자등을 재현해 당시의 풍류를 그대로 느낄수 있다.
우리도 잠시 쉬어 먹거리를 꺼내 목도 축이고 당시의 모습을 그리며 휴식을 취해본다.
조선시대 주막촌 사람들은 평시에는 첩보요원으로도 활용되고,
유사시에는 성을 지키는 수성(守城)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특히 조령 일대의 초곡방, 동화원 등지의 사람들은 산성별장의 보호 하에
생업인 주막을 운영하면서 첩보요원,산불방지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새재의 주막은 1930년까지 산판사업으로 번성하였다.
60년 전까지만 해도 막걸리, 돼지고기,산채비빔밥을 파는 주막이 많았다고 한다.
주막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니
돌에 새겨놓은 낯익은 이름의 한시가 보여 소개를 해볼까 한다.
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
시 : 매월당 김시습
새재는 남북과 동서로 나누는데.
그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 가는데.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구나.
이외에도 율곡 이이의 숙조령, 서애 류성룡의 새재에 묵다.등이
소개되어 당대의 문인의 기품을 엿볼수 있다.
[조령원터]
새재의 중요한 시설은 산성과 진(鎭) 그리고 교통시설의 역(驛)과 원(院)이다.
새재에는 역(驛)은 없고 3곳의 원(院)이 남아있다. 조령원,동화원.신혜원이다.
원은 역과 달리 일반 상인이나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위해 설치된
여인숙으로 상업과 민간교류의 커다란 역활을 하였다.
이곳 원터는 조령을 넘는 길손과 관원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고려시대에는 초점원, 조선시대에는 조령원이라 하였다.
[KBS촬영장]
[제 1관 주흘관]
문경새재의 역사속 사연과 전설 그리고,
선비와 보부상인등 당시 시대적 배경을 그리며 어느새 제 1관에 도착했다.
문경새재에는 옛 선인들의 이야기와 함께 전설도 그리고 아픈 역사도 가지고 있었다.
새재를 이야기 하다보니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나오고 쓰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여행이였다 .
[제1관 주흘관]
[옛길박물관]
제1관을 지나면 좌측에 옛길 박물관이 나온다 .
박물관에 들어서면 옛날 선비의 모습도.. 그리고
보부상인의 모습도 영혼으로 느낄수 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도란 도란 역사 이야기를 하며 걸어보면 어떨까.?
그 계절이 겨울이면 겨울이여서 그 풍경이 아름답고 ,
봄이면 봄이여서 그 길이 정겹고, 여름이면 그 푸르른 숲속이 좋다.
그리고 가을이면 짙어가는 가을과 함께
느끼는 문경새재 길은 아이의 손을 잡고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 였다.
그 옛날 선인들의 삶과 애환을 떠올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