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립공원

한려수도 통영 충무공 이순신의 넋을 찾아

緣佑(연우) 2011. 10. 29. 12:40

10월21일 금요일 진주 통영 답사를 가기 위해 오후 3시경 친구와 만나 대진고속도로를 달렸다.

대전을 지나 무주를 지날때쯤 가을비가 촉촉히 차창을 적셔왔다.

서진주 IC를 빠져나와 진주에서 지인과 합류해 저녁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 길 빗줄기가 힘을 다하는듯 쏟아진다.

"야 ! 가을 장마인가보다 "

"여행이 이런맛도 있어야지 "

친구의 너스레를 들으며 차에 올라 진주에 내려와 식당을 운영한다는 국민학교 동창을 찾았다.

내려오기전 진주에서 깨끗한 숙소를 구할수 있냐고 유선으로 물었더니만 .

자신의 식당앞에 얼마 안된 모텔이 있다고해서 친구 얼굴도 볼겸 겸사 겸사 친구의 식당을 찾았다.

친구는 서울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얼마전 처가가 있는 진주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신나는 날이 뭐야 ?"

"식당 이름이래 "

"네비에 나오는가.?"

"한번 검색해 보지 뭐 "

그렇게 찾아간 친구의 식당은 허름한 닭발집이였다.

진주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마음이 그래도 괜찮았는데

막상 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식당을 들어설때 몇몇 사람이 후미진 테이블에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기태야 ! 바쁜것 같은데 우리 내일 일정때문에 일찍 들어가 쉬어야 겠다 숙소는 어디야 ?"

"숙소? 저기 앞에 있잖아 거기가 제일 깨끗해 오픈한지도 얼마 안되고 "

"그래 그럼 우리 갈께 바쁘니까 다음에 가족들과 함께 오마"

이렇게 기약없는 말을 내던지고 식당문을 나서는데 마음은 무거운 짐을 진듯 무거웠다.

친구의 고생이 안쓰러워서 ... 그간 친구의 삶을 너무 잘알았기에 ....

모텔에 들어려하는데 데스크에 사람은 없고 안내판에 무인 결재 시스템이란 안내가 보였다.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러브텔이였다.

친구와 나는 서로 얼굴만 말똥 말똥 처다보며

"이거 어찌 하는거야 ?"

"야! 너도 모르는데 난들 아냐?"

 

 

그곳에서 잠시 서성이다 " 야 다른 곳으로 가자 " 며 친구의 옷자락을 끌었다.

남자 둘이 여행을 자주다니다 보니 가끔 모텔을 들어갈땐

야릇한 눈초리로 여간 심상치 않은 썩소를 날리는 불순한 생각의 주인장들이 더러 있었다.

" 우리 그냥 호텔로 가자 " "여기 동방호텔이 제일 좋다 하더라"

결국 동방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탓에 새벽4시에 일어나 씻고나서 할일이 없어 유선방송에서

방영하는 영화 한편을 보고 7시쯤 지인과 합류해서 진주에서 제일 맛집이라는 해장국집을 찾았다.

다른 팀과는 12시경 통영 유치환 문학관에서 합류하기로 약속되어 있어 아침을 먹고도

시간이 남았다

남는 시간에 진양호 일대를 드라브하며 시간을 때웠다.

 

진양호 공원 벤취위 가을이 찾아 들었다

때론 다정한 연인의 속삭임을 엿듣고

때론 어떤 외로운 이의 넉두리를 들어주며 늘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위로가 되어주었을 느티나무에 추색이 깃들었다.

오늘은 그렇게 촉촉한 가을비를 맞으며 이제 얼마후면 몰아 닥칠 겨울을 걱정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진주를 벗어나 통영에 접어 들었다 .

합류하기로 한 다른 팀이 도로 사정이 않좋아 한시간 이상 지체 된다고 한다.

놀토인데다 서울에서 8시쯤 출발을 했다고 하니

도로가 많이 정체될듯 했다.

"야 시간 아깝다 우린 일정에 없는 다른 곳을 더 돌아 보자"

그렇게 다른 곳을 더 돌아 보았다

 

 

통영 견내량이 내려다 보는 야트막한 언덕위에  충무공 이순신의 공원이 있다.

견내량을 향해 호령하는듯한 늠늠한 기상이 임진왜란 그때 왜군의 두려움이 보이는듯 했다.

내리는 빗속을 거닐며 가을에 젖어본다.

 

 

 

 

 

오후 2시쯤 다른 팀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청마 유치환의 문학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김밥으로 간단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통영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 유적지로 향했다.

충무공의 혼이 깃든곳 이곳 한산도는 1592년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루신 후 운주당을  지으시고 1597년까지 5년간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고

재해권을 장악하여 국난을 극복한 유서 깊은 곳이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고 살신구국의 높은 뜻을 후손만대에 전하도록하여

지시함에 따라 1976년 지금으로 모습으로 복원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박 대통령 색깔이 진하게 베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

 

 

 

 

활터의 표적 넘어가 왜매치이다

이곳에 전쟁에서 죽은 왜군들의 시체를 묻고 해상전을 고려하여 바다 건너 활 쏘는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저 소나무밑에 수 많은 왜군들이 묻혀 있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

 "공은 가셨어도 나라 사랑하시던 마음은 출렁이는 푸른바다와 함께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조국 수호의 영원한 횃불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옷깃을 여미고 공의 훈업을 가슴깊이 되새겨 영광된 통일조국의 초석이 되기를 다짐하자."

안내판에 쓰여진 글귀를 읽으며

박 대통령 시절 .... 국민학교때 늘상 외치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생각났다.

그때 그 애국심 ... 지금의 나의 조국..

현세대를 살아가며 우리 조국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나라를 사랑한다며  맹목적인 애국을 강요하면서도

자신의 이익과 이권만 챙기기에 급급해 권력을 지향했던 몇몇 지도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한산도를 떠나오는길.. 갈매기가 뒤를 따른다.

어둑한 어두움을 헤집고 창공을 가르며 유유한 갈매기를 보며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갈매기의 꿈을 생각해 본다.

 

 

 

 

여객터미널을 빠져나오는길 노을이 장관일듯 하여 친구와 달아공원으로 노을을 보러가자하고

일행을 따 돌리고 차를 몰았다.

통영대교를 넘을때 쯤 붉게 달아 오른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이 조급하다 .

달아공원에 도착했을땐 이미 노을이 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도로를 달리며 노을을 보았으니 그로 위안을 삼았다.

다음에 이곳에 오게 되면 그리 장관이라는 달아 공원의 노을을 꼭 보자 약속하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새벽6시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

친구와 미륵산에 오르기 위해 조심스럽게 짐을 챙겨들고 숙소를 빠져 나왔다.

다른 일행들은 밤새 음주가무에 지쳐 깊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다도해를 짊어지고 움터오는 아침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사진쟁이들이 이를 보면 얼마나 좋아 할까.

 

 

 

 

미륵도 미래사에 주차를 하고 케이블카 대신 등산을 하며 산에 오르기로 했다.

정상까지는 그래 멀지 않아 30분 남짓 걸으면 미륵산 정상에서

통영 앞바다와 견내량을 한눈에 바라 볼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곳은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운행되는데 요금은 일인당 9000원 정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주말에는 사람이 많이 몰려 기다리는 지루함이 만만치 않다고 하니

등산으로 산에 오르는 재미가 더 좋을 듯 하다 .

산에 오르면 여수 앞바다와 동쪽으로는 대마도까지 관측할수 있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산아래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묘가 보인다.

 

 

 미륵산 정상에 오르면 통영시를 한눈에 관측할수 있다.

위의 사진은 미륵산에서 바라본 통영시의 모습니다.

 

 

 

 다리가 보이는 곳이 견내량 앞바다 이다 .

한산대첩이 있었던곳 한산 앞바다와 다도해가 그림처럼 아침을 맞이한다.

충무공이 이곳에 삼도수군의 본영 새운이유를 볼려면 미륵산에 오르면

그 지형적 특성에서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을 한눈에 알수 있을듯 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쫒아 하루를 보냈다.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였지만.

그 적은 시간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여정이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그 위대한 업적이 우리에게 깊이 자리했던 시간

촉촉한 가을비 속에 친구와 둘이 일행을 따돌려가며 돌아야 했던 여행이였다.